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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Review] 인식의 프레임을 너머, 직면이 가능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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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안온함(해)과 관념적 일탈(달)이라는 대치적 상징을 한 프레임에 의도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인물들 사이에 감도는 몽환적이면서도 위태로운 심리적 균열을 일러스트 고유의 레이어로 시각화하였다.” 
- RYC LAB -

이창동의 《가능한 사랑》  리뷰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을 둘러싼 평단의 담론은 명확해 보인다.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이라는 찬사 속에서, 영화는 계급의 구조적 간극, 타인의 고통을 관찰하는 창작자의 윤리, 그리고 현대 사회의 레이어를 짚어내는 ‘거대한 담론의 신전’으로 정립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정교한 사회학적 비평의 틀을 한 꺼풀 도려내면, 스크린 밑바닥에서 요동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미시적 레이어가 드러난다. 그것은 고상한 계급적 자각이 아니다. 이미 손에 쥐고 있던 진짜 사랑을 두고 헛된 욕망을 기웃거리다 엉망으로 꼬여버린 현장의 조잡한 수치심, 그리고 타인의 시선 앞에 무너진 자존감을 안고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려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방어 기제다.
 

 

이미 완성되어 가던 사랑, 그리고 찰나의 침범
이 영화를 ‘불가능한 사랑을 열망하는 비극’으로 단정하기 전에, 스크린 속 두 부부의 일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삶을 묵묵히 지탱하던 것은 이미 그들 안에서 차곡차곡 완성되어 가던 ‘진짜 사랑’이었다. 팍팍한 삶의 궤적을 함께 견뎌온 해고 노동자 부부의 단단한 연대와 일상은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가능한 사랑’의 실체였다. 당연히 가능했고, 이미 손 안에 존재하던 사랑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인간의 약함은 자신이 누리던 완성된 사랑을 곁에 두고도, 자신에게 없는 타인의 삶을 가만히 반추해 보는 ‘은밀한 동경’을 품게 만든다. 미옥(전도연)이 상우(조인성) 앞에서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찰나의 순간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과 억압에 짓눌려온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자 했던 본능, 그리고 "좋은 일이 생겼다"며 웃음 짓던 상우의 무해한 여유와 온기에 순간적으로 흔들린 마음. 미옥이 느낀 것은 거창한 계급적 질투가 아닌, 내 삶에는 없던 상대의 심리적 '자유'에 대한 은밀한 동경이었다.
 

 

 

 

그러나 미옥과 상우가 바다에서 마주한 그 순간, 그리고 예지(조여정)가 타인의 상처를 프레임 안에 포획하려던 시도는 거창한 진실이나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삶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보고자 했던 찰나의 일탈이자 거추장스러운 호기심, 딱 거기까지의 흔들림에 불과했다. 이 불필요한 흔들림이 불청객처럼 침범하면서, 그들이 구축해 가던 기존의 일상에는 지독한 모멸감이라는 침전물이 끼어들게 된다.
 

거창한 계급 분석을 압도하는 현장의 당혹감과 수치심
해변 사건 이후 두 부부가 보여주는 파국은 "상대와 내가 서로 다른 계급임을 자각하고 그은 서늘한 선"이 아니다. 찰나의 헛된 호기심이 불러온 현장에서 밀려드는 지독한 민망함과 자존감의 붕괴다.

미옥이 맛본 찰나의 해방감이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가 구축해 놓은 시선의 프레임에 포획되는 순간, 그것은 단숨에 '부유한 자들의 유희를 위한 구경거리'라는 수치심으로 전락한다. 호석(설경구) 역시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삶의 존엄이 그들의 호의와 일탈 속에서 재료처럼 소비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감당하기 힘든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이 순간 인물들을 움직이는 진동수는 사회 구조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아니다. 숨이 턱 막힐 듯한 민망함 앞에서 “더 이상 내 민낯이 까발려지는 것을 견딜 수 없다”며 내지르는 본능적인 비명이다. “우린 여기까지다”라는 선언은 이성적인 관계의 절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헛된 일탈이 가져온 비참한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하고자 선택한 지극히 솔직하고 비겁한 철수였던 셈이다.
 

기억의 주인을 뒤흔드는 미학, 그리고 스크린 너머의 서글픈 환상
영화 속 플래시백은 인물들이 직접 회상하는 순간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프레임이 개입하는 시점에 교묘하게 작동한다. 미옥이 어린 시절 세차장에 살았던 비참한 기억을 털어놓을 때 영화는 즉시 과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다큐 감독인 예지가 카메라를 켜고 다시 말해 달라고 요청하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스크린에 회상 화면이 펼쳐진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기억의 주체성을 뒤흔들며 관객의 인식 체계를 제어하는, 이창동 특유의 미학적 정점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연출적 모호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속 가장 무방비하고 파격적인 순간들 (예를들어 화장실 씬이나 해변 씬과 같은 자극적 일탈의 장면들) 조차 인물들의 실제 행적이 아닌, 누군가가 재구성한 '관념적 상상'은 아닐지 가만히 가늠해보게 만든다.

스크린 위에 흩뿌려지는 찰나의 자유를 바라보며 관객은 묘한 심리적 균열을 겪는다. 저 일탈이 인물들이 실제로 쟁취한 원초적 해방이기를 열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져올 후폭풍 같은 모멸감을 예감하기에 차라리 스쳐 지나가는 아련한 환상이길 바라는 안타까운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결국 그 강렬한 순간들은 인물들의 실제 일상이라기보다, 고단한 부부에게 잠시나마 굴레 없는 자유를 선물하고 싶었던 스크린 밖 관객 스스로가 머릿속으로 조용히 엮어낸 '상상 속의 프레임'일지도 모른다.
 

거대 담론 너머, 무력한 인간이 마주한 비참함의 생얼굴
부유함이 지닌 무해한 여유와 타인을 관찰하는 프레임처럼, 사회적 시스템이 은밀하게 휘두르는 시선의 폭력 앞에서 인물들이 체화하는 감정은 결코 거대 담론이 아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인물들(《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베스,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이 시스템의 비극 앞에서 숭고한 저항 대신 '두려움과 환상'으로 도망쳤듯, 이창동의 인물들 역시 극단적 한계에 내몰린 개별 인간의 심리적 파경을 드러낼 뿐이다.

《가능한 사랑》의 미옥과 호석 역시 이 심리적 궤적을 그대로 따라간다. 부유한 부부의 호의와 다큐멘터리의 프레임이 자신들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끌어내렸을 때, 미옥과 호석은 계급 투쟁의 주체가 되는 대신 당장의 비참함을 모면하기 위해 가방을 싸는 선택을 한다. 부유한 부부 역시 선의가 어색하게 틀어진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그저 상황이 흘러가기만을 바란다. 거창한 철학의 대립이 아닌, 상황의 중압감에 짓눌린 인간들의 보편적 약함이 정밀하게 스크린 위에 포착되는 순간이다.
 

헛된 욕망이 걷힌 자리에 다시 남는 '진짜 사랑'
그렇다면 이 영화는 환멸과 완전한 차단으로 마침표를 찍는가? 역설적이게도 이창동 감독의 시선은 헛된 욕망이 산산조각 난 이후,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한다.

모든 가짜 친밀함과 수치스러운 소동이 지나간 뒤, 미옥은 예지에게 보름달 사진을 찍어 보내려 한다. 자랑할 데라곤 하나도 없던 고립된 존재가, 가장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던 상대에게 무언가를 건네려는 이 심리는 매우 미묘하다. 이것은 계급을 뛰어넘은 거창한 연대의 선언이 아니다. 쓸데없는 욕망과 지독했던 수치심의 소동이 지나가고 감정이 다시 가라앉았을 때, "우리가 겪었던 그 소동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작은 조각 하나는 건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가만히 손을 내미는 인간 본연의 다정함이자 미련이다.
 

깊은 울림을 남기는 물음표
《가능한 사랑》이 지닌 영화적 미학은 계급과 윤리라는 선명한 비평적 틀 안에 갇히지 않는 데 있다. 영화는 거대한 신전의 그늘 아래 숨어 있는 인간의 헛된 욕망, 그로 인해 초래된 본능적인 수치심과 도망, 그리고 다시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진짜 사랑으로 돌아가는 삶의 끈질김을 비범한 연출력으로 담아낸다.

이미 가능했던 사랑을 뒤로한 채 헛된 열망을 기웃거리다 스스로 수치심 속에 갇히는 인물들의 모습은, 결국 스크린 밖 우리의 초상이기도 하다. 이창동의 《가능한 사랑》은 인물들을 계급적 화해나 거창한 구원으로 내몰지 않는다. 그저 헛된 욕망이 지나간 자리에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일상의 온기를 바라보게 할 뿐이다. 영화는 구원의 답을 제시하는 대신,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던 삶의 실체를 향해 서늘하고도 따뜻한 질문을 던진다.

 

이미지 - 영화 ‘가능한 사랑’ (넷플릭스) ,  RYC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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