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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 헌터스>, K부심의 풍악 너머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를 보고 나면 가슴에 K부심의 풍악이 울린다. K팝 아이돌이 K뷰티의 상징인 반듯한 눈썹을 하고 세상을 구하는 'K' 서사의 잔치가 열리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에선 볼 수 없어 아쉬웠던 찬란한 대도시 서울을 배경으로 K푸드, K관광, K사후세계까지 등장한다. 라면을 라멘이 아닌 '라면'으로, 김밥을 스시가 아닌 '김밥'으로 또박또박 발음하는 장면에선 광복절에만 깨어나는 각시탈의 자아가 소환되기도 한다. 

 

 

한국학자 오구라 기조는 저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한'을 이렇게 정의했다. "한은 상승에 대한 동경임과 동시에 그 동경이 어떤 장애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슬픔, 억울함, 아픔, 맺힘, 고통의 느낌이다." 언제까지라도 어깨춤을 추게 하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세상을 들여다보노라면, 'K팝 미국 실제 인기', '불닭볶음면 해외 인지도' 따위를 수없이 검색하며 뭔가를 자꾸 확인하려 했던 한 많은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주는 감동의 본질은 국뽕이 아니다. 헌터들이 구하는 세상은 'K'OREA 보다 넓다. 넷플릭스 글로벌 영화 차트 1위!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OST) 빌보드 HOT 100 차트 점령! 이 흥겨운 성공의 자진모리장단 너머에는 좀 더 특별하고 저릿한 이야기가 있다. 

 

 

K팝,주인공이 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걸 크러시와 부드러운 남성성'이라는 K팝 아이돌의 전통적인 콘셉트로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한다. 이 영화에는 몇 가지가 없다. 아시아계 캐릭터의 스테레오타입인 브리지 헤어, 세탁소나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가부장적인 부모, 운명을 점지하는 신비로운 노인이 없다. 주인공인 최정상 K팝 걸 그룹이자 퇴마사 '헌트릭스(HUNTR/X)'는 자신들의 음악처럼 현실도 '셀프 프로듀싱'한다. 아시아계 여성에 대한 성별 인종주의가 투영된 캐릭터인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는 '자스민 공주', 오리엔탈리즘 판타지의 잔 다르크 '뮬란', 복종하는 이방인 여성으로 객체화된 '게이샤' 카테고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헌트릭스는 성공한 팝 가수의 상징인 전용기 안에서 크고 아름다운 날붙이로 단칼에 악귀를 처단하는 영웅적 여성 캐릭터이다. 광활한 스타디움 콘서트에서 남자만 계승했던 조선 왕조의 권위를 형상화한 일월오봉도를 무대에 두르고 용기와 희망, 자기 긍정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공연을 보고 있으면 강인함과 화려함을 향한 선망, 자기 해방의 쾌감이 뜨겁게 차오른다. 이 국경 없는 감정은 K팝이 글로벌 시장에 뿌리 뻗을 수 있었던 이유이자, 헌트릭스의 힘의 근원이다. 그들은 음악의 힘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식하는 악귀 대왕 '귀마'로부터 인류를 수호하는 결계인 '혼문'을 완성해 나간다.

 

 

헌트릭스에 대항하는 저승사자 남자 아이돌 '사자보이즈(Saja Boys)'도 새로운 성별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들은 아시아계 남성 캐릭터로는 몹시 예외적으로 수학이나 쿵후 실력이 아닌 외모로 승부한다. 화장하고 스키니진을 입은 K팝 남자 아이돌을 비꼬는 표현인 '게이 팝(Gay Pop)' 스타일로 등장하여 춤과 노래, 부드러운 남성성으로 대중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갓을 쓰고 검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파멸적 사랑을 속삭이는 <Your Idol> 무대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악귀이자 아이돌인 사자보이즈의 정체성과 K팝의 미학이 집약된 이 무대는 수많은 커버 댄스로 다시 태어나 온라인을 달구고 있다. 이 매혹적이고 안전한 2차원 아이돌을 향한 열광은 K팝 남자 아이돌이 왜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지 미러링해서 보여주기도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K팝의 세계관을 영화로 확장해 아시아계 캐릭터의 클리셰를 깨고,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연다. 노래하고 춤추고, 맞서 싸우며 끝없이 움직이는 캐릭터들은 이 영화가 인종·성별·문화의 고정관념을 허무는 역동과 연결되어 강렬한 카타르시스 준다. 그리고 모든 즐거움은 영화의 서사와 감정을 응축한 매력적인 OST와 만나 증폭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는 다양한 문화적 맥락이 공명하며 만드는 감동, 전복의 쾌감이 있다. 이것이 팬은 물론, K팝 문화에 생소한 글로벌 관객들에게도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높은 문화의 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전까지, 서구권에서 K팝은 마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방계 혈족들의 이야기처럼 다뤄졌다. 가장 구체적으로 K팝을 소재로 한 영화는 <조이 라이드>일 것이다. 미국으로 입양된 오드리(애슐리 박)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 K팝 걸 그룹으로 사칭하는 사건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과장된 스타일링, 무지성으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로 K팝 스타의 유명세를 한국 그 자체로 납작하게 타자화한다. 음악을 주제로 한 <유로 비전 송 콘테스트- 파이어 사가 스토리>, 넷플릭스 시리즈 <걸스 파이브 에바>에도 K팝을 덜 문명화된 문화로 희화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차별적인 묘사는 단지 한 음악 장르에 대한 비존중에서 그치지 않는다. 백인 중심 사회가 비서구 문화를 어떻게 소비하는지 전시하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에 대한 인종주의적 비하까지 노출한다. 그러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아무것도 우습게 여기지 않는다. 메기 강 감독과 한국계 제작진, K팝 전문가들이 함께 만든 이 영화에는 K팝과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담겨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비서구 문화로는 이례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크게 성공한 K팝의 정수를 담아낸다. 동화적인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틱한 음악, 화려한 퍼포먼스, 따라 하고 싶은 쿨한 스타일링.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황금빛 혼문으로 만드는 열광적인 팬들의 존재까지 가져와 K팝을 새로운 차원에서 살아 움직이게 한다. 그 역동에는 K팝이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될 만큼 경쟁력 있는 스토리와 시장성을 가졌다는 경쾌한 확신도 담겨있다. 여기에 과감하고 심미적으로 재현한 한국 전통문화, 풍속과 유행이 교차하는 낭만적인 도시 풍경을 그려 내 K팝의 토대인 한국 문화의 층위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한다.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백인 중심 사회 바깥의 문화를 진정성 있게 담아낸 콘텐츠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의미 있는 선례도 남겼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한국 문화를 존중하는 방식은 K팝의 방식과 맞닿아있다. K팝은 많은 자본과 노력을 투자해 한국 문화를 장르의 뿌리이자 정체성으로 발전시켜 왔다. 한복을 재해석한 스타일링, 국악 샘플링, 찜질방에서 양머리 수건을 쓰고 퀴즈를 푸는 '자컨(자체 제작 콘텐츠)'까지. 시대와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한국 문화를 재발굴하고, 글로벌 트렌드와 융합해 매력적인 세계관을 구축해 왔다. 그 성과를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와를 무대에 올린 블랙핑크의 2023 코첼라 헤드라이너 공연이 없었다면 헌트릭스의 일월오봉도 무대는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북청사자놀음과 어울려 춤췄던 BTS의 <IDOL>, 강렬한 붉은 색 대비 연출로 인상을 남긴 2017 MAMA <MIC Drop> 무대가 없었다면 사자보이즈의 <Your Idol>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세계는 '한국적인 것' 보다는 'K팝적인 것'에 가깝다. 글로벌  팬들이 이질감 없이 영화를 받아들이고, 고증의 디테일에 함께 열광하는 이유는 한국 문화가 로컬을 벗어나 K팝 세계관의 중심축으로 진화하는 여정에 함께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이 오직 한없이 갖고 싶다고 말씀하신 '높은 문화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일 테다. 

 

K부심의 풍악 소리가 커질수록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K부심의 풍악 소리가 커질수록 잦아지는 것들에 대해 질문한다. 이야기에서 헌트릭스는 자기 서사의 주도권을 쥐고 운명에 맞서 싸우는 주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이 사는 펜트하우스는 경제적 권력보다 결정의 권력을 상징한다. 기획사 대표이자 정신적 지주인 셀린이 강조하는 "흠집과 두려움을 내보여선 안 돼"라는 금기를 깨고 진정한 나 자신을 찾는다. 사자보이즈의 리더 진우는 비록 귀마에게 속박되어 있지만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사뭇 다르다. K팝 아이돌은 아무것에도 맞서 싸우면 안 된다. '흠집과 두려움'은 물론 소신과 감정도 쉽게 내보여선 안 된다. K팝의 위상이 높아지고, K부심의 풍악이 더 요란해질수록 이들을 에워싼 침묵의 결계는 더욱 견고해진다. 매니저 바비는 헌신적인 협력자로 등장하지만, 현실은 그렇게까지 낭만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세상의 절대 질서이자 정의인 혼문의 근원인 팬들은 현실에선 끊임없이 주변화된다.

 

​글로벌 K팝 팬들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열광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K팝이 아직 도착하지 못한 미래를 꿈꾸게 만들기 때문이다. ​헌트릭스가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세상을 황금빛 혼문으로 물들인 것처럼, 언젠가 현실에서도 그 찬란한 순간을 마주하리라 믿는다. K팝은 언제나 우리를 꿈꾸게 하는 음악이니까.

 

<사진출처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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