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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김태희

정확에 가까운 미모, 데뷔와 동시에 증명된 이지적 면모. 재색겸비, 팔방미인 같은 수식어로 대중의 인식에 선연하게 각인된 배우 김태희. 그런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발견한 것은 <마당이 있는 집> 주란과의 공통점이었다. 몇 가지 교집합 사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주목할 만한 것은 단 하나. 단단하고 묵직하게 자리잡은 내면. 김태희와 문주란이 서로의 거울처럼 닮아있던 부분이었다. 언제든 상황을 반전시킬 만큼 강인하며, 일순간 모습을 드러내 모두를 놀라게 할 만한 잠재력을 지닌, 고요한 동시에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굳센 마음. 문주란과 김태희 사이, 그 어딘가에 자리한 그와 만나 그의 지난 궤적을 훑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몰랐던 김태희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리며. 

 


 

1. [RSK] 우선 축하드려요.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이 좋은 성적으로 막을 내렸어요. (인터뷰일 기준) 며칠 전 마지막 화가 공개됐는데, 무사히 종영을 맞이한 기분은 어때요? 짧은 만큼 아쉽기도, 힘든 감정을 유지해야 했던 만큼 시원하기도 할 것 같아요.

 

이번 드라마는 8부작이었어요. 예전엔 늘 16부작 이상을 했었죠. 거의 생방송에 가까운 스케줄로 쪽대본을 받기도 하고, 매일 밤샘 촬영하면서, 정말 육체적으로 정신없이 힘들게 촬영했어요. 그러다가 100% 사전 제작 8부작을 하니 스케줄 자체는 여유롭고 쉬는 날도 딱 보장돼서 그런 면에선 너무너무 편했어요.(웃음)

 

 

 

2. [RSK] 극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잠돼 있는 만큼, 심적으로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5개월 동안 주란으로 살며 인물의 감정이 스며들기도 했을 것 같고요. 일상으로 돌아가서 마음은 잘 추슬렀는지 묻고 싶었어요.

 

주란의 마음이 늘 우울하고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힘들지 않았냐고 많이들 물어보시더라고요. 물론 주란의 마음으로 들어가 보면 큰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힘든 부분이 있긴 하지만 열심히 촬영하고, 모니터링하며 느낌을 체크하고, ‘다른 느낌으로 시도하면 어떨까’를 상의하는 시간에 집중할 수 있어서 아주 힘들지만은 않았어요. 또, 촬영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땐 음악을 들으면서 갔거든요. 충분히 마음 잘 추스르고, 편안하게 정리해서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아요.

 

 

3. [RSK] 가족이나 친구, 주변인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다들 뒷 내용을 많이 궁금해했어요. ‘혹시 주란이 범인이야?’ 하는 추측도 많이 하고요. ‘주란이 이상하고, 의심스럽고, 수상해 보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연기를 한 건 아니었거든요.  ‘온전히 주란의 마음이 돼서 진심을 담아 연기를 하자’는 마음이었는데 많이들 의심하고, 뒷이야기를 되게 많이 궁금해하더라고요. 그리고 제 걱정과는 달리 주란의 심리 형태를 잘 쫓아와 주셨어요. 저는 솔직히 1부 마지막 장면에서 제가 봤던 게 시체임을 확인한 후 ‘내가 맞았어’라는 어떤 안도감과 해소감으로 웃는 모습이 나올 때 ‘약간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다들 당연하게 이해하는 걸 보고, 우리 작품이 좀 어렵기도 하고 추리물이라 집중해서 봐야 하는데도 ‘이 장르물을 제대로 즐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만족스러웠어요. 감독님이 그걸 잘 만드셔서 그렇게 된 거겠죠. 생각보다 많은 분이 되게 사랑해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제대로 즐겨주신 것 같아서 저는 되게 감사해요.

 

 

 

4. [RSK] 자신이 만든 주란을 마주했을 때는 흡족스러웠나요?

 

우리 드라마가 앵글이 되게 독특했잖아요. 예를 들어, 나는 뒷마당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남편과 아들은 아니라고 하고,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하면서 설거지를 하는데, 옆집에 이사 온 해수가 인터폰을 눌러 재호랑 대화하다가 “무슨 냄새야” 하니 그 소리에 제가 반응하고요. 그때 앵글이 저를 잡고 있다가 45도로 기우는데, 그런 효과가 흔들리는 마음을 정말 잘 표현했어요. 또 어떤 장면에선 제 뒷모습을 주로 보여준다거나 상대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안 보여준다거나 했는데, 이런 연출이 오히려 표정을 상상하게 하고 훨씬 큰 효과를 주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을 되게 잘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음악도 <하이바이, 마마!> 때랑 같은 음악 감독님이시거든요. 그때도 제가 음악을 너무 좋아했어요. 이번 작품도 같이 해주셨는데, 너무나 다른 장르인데도 표현을 잘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저는 너무 만족스러웠어요.

 

 
 

 

5. [RSK] 연기하며 주란과의 닮은 점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었어요?

 

주란은 말이 없고, 자기가 생각하는 거, 느끼는 거, 본인의 감정이나 의견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잖아요. 저도 옛날에 많이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경향이 아주 없진 않아요. ‘100% 이건 맞아’라고 확신을 해야만 입 밖으로 꺼내요. 한 번 내가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걸 너무 싫어해서 주란의 소심하고 위축된 모습, 그런 면들이 제가 예전에 많이 가지고 있던 부분이라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런 부분들을 많이 없애려고 노력해서 많이 유연해진 것 같아요.

 

 

 

6. [RSK] 많은 장면이 그랬을 것 같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감정 처리가 어려웠던 장면, 감정 연기에서 가장 빠져나오기 어려웠던 순간을 꼽자면요?

 

대본을 보고 ‘이 장면 진짜 어려울 것 같다’라고 느꼈던 장면이 뭐였냐면, 장례식장에서 상은이 갑자기 다가와서 “당신 남편이 내 남편을 죽였어요”라고 얘기하는 장면이에요. 생판 모르는 여자가 와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데, ‘이 여자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은 주란이 상은을 찾아가고 이것저것 물어보잖아요. 근데 주란은 다가오는 이웃조차 차단하는 폐쇄적인 인물이니 그렇게 찾아갈 때는 진짜 큰 용기가 필요했을 거예요. 속으로 정말 많이 혼란스럽고 그래서 도저히 찾아가지 않고선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고요. 이 낯선 여자를 완전히 믿을 수도 없고, 남편을 또 완전히 의심할 수도 없고. 그런 마음속에는 폭풍 같은 소용돌이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을 또 이 여자에게 들켜서는 안 되고, 나는 가정을 지켜야 하고. 막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데 그 안에서 이 여자가 말하는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내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둘이 딱 마주 앉아 얘기하는 간단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더라고요. ‘남편이 진짜 나쁜 사람인가?’, ‘이 여자가 말하는 대로 남편이 부적절한 관계를 갖다가 협박당한 걸까?’하는 주란의 마음을 계속 느끼면서 연기하다 보니까 심적으로 굉장히 힘들고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됐어요. 또 그걸 말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표정과 눈빛으로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 장면이 저는 되게 되게 힘들었어요.

 

 

7. [RSK] 그래서 후반부로 들어설수록 주란이 자신의 주관을 되찾고 각성하는 모습이 더 인상깊었어요. 극의 무게도 묵직한 와중에 소용돌이치는 인물의 감정까지 온전히 소화해야 해서 여러모로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역에 녹아들기 위해 각별히 기울인 노력이 있는지도 알고 싶어요.

 

주란이 말로 표현하진 않아도 마음속으론 정말 많은 생각을 하고 속에선 폭풍이 휘몰아치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런 주란의 마음이 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또, 주란이 언니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사건을 겪으면서 나 때문에 그랬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힘들어했잖아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신경 쇠약에 걸리고, 남편의 울타리 속에서 폐쇄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런데도 주란만이 갖고 있는 어떤 세계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어요. 주란의 내면엔 분명히 강한 힘이 있고, 그 힘이 결국에는 나중에 드러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8. [RSK] 현장에서 생긴 에피소드도 있을 것 같아요.

 

장례식장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치매기가 있는 상은의 엄마가 저를 막 껴안으면서 “내 딸 하라” 그러고, 저는 당황스러워서 “비켜주세요” 하는. 그러다 상은 엄마가 넘어지셔서 막 우시니까 주란이 다가가서 괜찮냐고 하거든요. 그걸 본 상은이 다가와서 제 팔을 낚아채곤 “당신 남편이 내 남편을 죽였다”라고 말하고요. 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패닉이 된 상황인데 그때 재호가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뛰어 올라와서 상은 팔을 낚아채곤 “뭐 하는 짓이냐”고 해요. 원래는 타이밍 맞게 뛰어오셔서 상은의 팔을 딱 낚아채야 하는데, 너무 급하게 달려오시고 장례식장이라 둘 다 검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모르고 제 팔을 낚아채신 거예요.(웃음)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메이킹에 들어갔을 수도 있어요. 그때 진짜 상은이(임지연)랑 저랑 완전 박장대소했어요.(웃음)

 

 

 

9. [RSK] 만일 극 중에서 다른 배역을 맡는다면 어떤 역할을 시도해 보고 싶어요?

 

상은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주어진 상황이 세잖아요. 임신 5개월에, 가정 폭력 남편에, 정말 비참한 삶을 살고 있고요. 그래서 이 캐릭터는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정말 많이 달라질 수 있겠다 싶었고, 다양한 변주가 가능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로서 그런 역할도 되게 욕심이 났고, 상은 캐릭터가 굉장히 욕심이 났지만, 임지연 씨가 이미 캐스팅이 돼 있기도 했고, 또 저는 주란 역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음엔 그런 역할도 해보고 싶고, 또 <나를 찾아줘>라는 영화에서 로자먼드 파이크가 맡은 역할이 있어요. 결국 이 여자가 되게 무서운 캐릭터였던 건데, 그 영화도 굉장히 재밌게 봤거든요. 그래서 그런 역할도 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10. [RSK] 2001년 첫 번째 작품을 시작으로 22년이 훌쩍 흘렀고, 어느덧 스물두 번째 작품을 마무리했어요. 하나의 직업을 오랜 기간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런데도 계속해서 연기에 대한 갈망이 지속되는 이유와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사실 예전에는 연기 자체를 막 사랑한다기보다는 ‘나한테 온 귀한 기회를 내가 잘 해내고 싶다’, ‘놓치면 평생 후회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팬분들이 제 작품을 재밌게 볼 때 너무 보람되고, 그런 연기 외적인 부분이 좀 더 컸던 것 같아요. 근데 <하이바이, 마마!> 할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현장이 너무 재밌고 저한테 다가오는 느낌이 좀 달라지는 거예요. 저한테 있어 연기가 주는 의미가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더 점점 더 사랑하게 됐고, 항상 다른 작품과 다른 캐릭터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배우라는 직업이 절대로 질리거나 하는 일 없이, 프로젝트 때마다 굉장히 새로운 느낌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신중하게 되고, 어렵고… 그렇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는, 그런 일인 것 같아요.

김태희의 다양한 화보 이미지와 인터뷰 전문은 곧 발간될 롤링스톤 코리아 11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hotographs by Zoo Yong G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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