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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히트곡을 내기 전, 숀 폴은 그저 벽에 붙은 파리일 뿐이었다

 
3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숀 폴(Sean Paul)은 음악 산업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CD는 다운로드에 자리를 내주었다. 다운로드는 스트리밍이 되었다. 숏폼 비디오는 노래가 퍼져나가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고, 이제 AI는 아티스트들에게 창의성이란 과연 무엇인지조차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미 어워드와 플래티넘 리코드를 달성하기 한참 전, 숀 폴은 그저 어떻게든 음악에 가까워지려고 애쓰던 십 대 청소년이었다. “저는 항상 평범한 드럼 세트나 기타를 가지고 놀고 싶었습니다. 그저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뿐이죠. 밴드를 하셨던 삼촌이 계셔서 집에 있을 때 피아노나 오르간을 만작거리곤 했지만, 그마저도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19살이나 20살이 되었을 때, 그 호기심은 집착으로 변했다. 기회만 생기면 그는 자메이카 전역의 녹음실을 찾았다. 모두가 보러 온 주인공 아티스트로서가 아니라,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관찰자로서 말이다. "저는 어떤 방식으로든 저 자신을 참여시키려고 애썼습니다. 벽에 붙은 파리처럼 가만히 서서 다른 대형 아티스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이죠. 그러면서 댄스홀(Dancehall) 음악의 즉흥성과 본질이 무엇인지 배우려고 했습니다. 그 뿌리를 확인하고 제 자신을 거기에 맞춰보려고 했죠. 그때는 아무도 저를 몰랐습니다."

 

그 이미지는 대화 내내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숀 폴이 댄스홀 음악의 가장 위대한 글로벌 대사가 되기 전에, 그는 그저 주변의 다른 누구보다 더 오래 지켜보고, 더 늦게까지 남아있으며, 더 많이 배우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길은 한 번의 행운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단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낸 결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에서 겪었던 주저함은 아티스트의 삶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왔다. 그의 어머니는 미술로 생계를 유지하며 화실 작품을 팔아 가족을 부양했고, 아버지는 스크린 인쇄 사업을 함께 운영했다. 어머니는 창작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불확실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 아들만큼은 다른 길을 걷길 바랐다.
 
“재밌는 건 저희 외할아버지도 어머니에게 똑같이 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결국 아티스트가 되셨죠. 저는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림을 팔아서 가족을 부양하셨고, 아버지와 함께 스크린 인쇄 회사를 운영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계약을 따오면 어머니가 아트워크를 작업하시고, 공장 직원들이 셔츠에 인쇄를 하는 방식이었죠. 어머니는 미술로 돈을 버셨기 때문에 제가 그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너는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정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셨죠. 어머니에게는 저와 제 남동생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식탁에 음식을 끊이지 않게 하는 일이 너무나 힘든 시기였으니까요.”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물었을 때, 그는 차트나 수상 경력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감옥에 몇 번 가셨고, 어머니는 1년 정도 캐나다로 떠나 계셨습니다. 대략 2년 정도였죠. 그 시기에 아버지가 다시 사고를 치셨고, 저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막 벌기 시작한 제 돈을 써서 아버지를 합의금으로 꺼내드려야 했습니다. 정말 밑바닥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음악 판에서 큰 주목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공연을 찾으려고 두 곳의 예약 대행사를 찾아가 '저를 공연에 세워줄 수 없나요? 돈이 정말 필요합니다'라고 사정하곤 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많은 곡을 녹음하면서요."

 

성공이 찾아온 후에는 그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쉽다. 하지만 배낭 가득 CD를 채워 넣고 길거리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며, 언젠가 누군가 재생 버튼을 눌러주기를 바라던 숀 폴의 모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등장하기 이전의 홍보 방식이었다. 바이럴 영상도 없었다. 추천 엔진도 없었다. 오직 끈기뿐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음악을 둘러싼 대화는 변했다. 아티스트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주의 집중 시간은 짧아졌다. 스트리밍은 리스너들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고, AI는 창작 과정 자체를 재형성하기 시작했다.
 
숀 폴은 이 모든 과정을 목격했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이러한 변화에 대해 반감이나 억울함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는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음악을 만들었고, 음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는 네 음악의 소유권을 가져가지 못하는 계약을 맺었잖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에게 가능했던 선택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나의 음악일 것입니다. 내 마음과 영혼에서 나온 음악이고 제가 부르고 있으니까요. 다른 누구도 나처럼 부를 수 없고, 나처럼 쓸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바라봅니다.”
 
모든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스트리밍에 대해서는 그 역시 복잡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스트리밍은 다소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 음악을 직접 소유하고 싶거든요. 언제든 꺼내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 아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할 때, 휴대폰 터지지 않으면 내 노래를 들을 수 없습니다. LP 판이나 아세테이트를 직접 소유하고, 앨범 사진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던 세대에서 자란 저로서는 참 답답한 일이죠. 당시에는 함께 볼 비디오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 사진 한 장만을 보고 온갖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AI에 대한 그의 생각도 비슷한 궤를 그린다. 그는 AI를 배척하지 않는다. 단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AI가 대체하도록 두지 않을 뿐이다.
“AI는 제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드럼이나 베이스 같은 리듬의 뼈대를 만든 다음 AI에게 넘겨서 '완성해 봐'라고 시켜본 적도 있습니다. 정말 다양한 옵션이 나오더군요. 하지만 그 모든 결과물에는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건 절대 이렇게 연주하지 않을 텐데, 나한테는 너무 터무니없다' 싶은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숀은 여전히 스튜디오 안에서 뮤지션들이 함께 잼 연주를 하는 것을 선호한다. 여전히 라이브 밴드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음악은 결국 프롬프트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고 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대화 내내 계속해서 떠오른 한 단어가 있었다. "나는 벽에 붙은 파리였다."

 

숀은 이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어쩌면 이 표현은 그의 커리어 전체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문장이자, 그를 진정으로 차별화해 준 요소일 것이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몰랐을 때, 그는 지켜봄으로써 배웠다. 아무도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을 때, 그는 배울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머무는 방법을 찾아냈다. 아무리 많은 문이 닫혀 있더라도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곳을 향해 다가가던 그 본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인터뷰장을 나서며 나는 그 문장을 계속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단순히 올바른 기회를 만났을 뿐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숀은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성공한 이들은 그 기회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서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열정의 진짜 모습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그 무언가를 향해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


 

사진 제공 : Sean Pa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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