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케이팝 신은 그야말로 걸그룹의 전성시대다. 저마다 다른 기획과 아이디어로 무장해 서로의 눈치를 보며 파이의 한 조각을 탐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등장한 걸그룹들의 음악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대부분 남성 청자와의 전형적인 플러팅이 아닌 여성의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고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는 분명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주의가 중요한 시대정신으로 떠오르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의 관점에서 기술된 여성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 아티스트에 대한 이 같은 예외적 관심과 이에서 비롯된 치열한 경쟁 구도는 케이팝 신을 새로운 그룹들의 기존과 다른 뭔가 새로움을 보여주기가 어려워진 무대로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디서 본 듯한, 어딘가 익숙한, 기존에 들어본 것 같은 음악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진부한 콘셉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키스 오브 라이프의 데뷔는 어쩌면 기대감보다는 우려 속에 이뤄졌다. 신인그룹으로서, 그것도 중소 신생 기획사의 그룹으로서 이들은 과연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런데 이들은 이 우려를 모든 면에서 아주 자연스럽고 영리하게 돌파한다. 파격적이지 않지만 충분히 신선하고, 익숙하지만 식상하지 않은 음악들,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키스 오브 라이프의 데뷔작을 듣고 가장 놀라웠던 점은 예외적으로 잘 준비된 이들의 음악적 역량이었다. 시스템화된 케이팝 산업에서 신인 아이돌들의 능력치는 이제 상당 부분 상향평준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스 오브 라이프의 데뷔는 멤버들의 기량이라는 측면에서 몇 년 사이 케이팝 신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의 능력이 전방위적으로 걸쳐 있으면서도 파트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랩, 노래, 춤 등 거의 모든 포지션을 자연스럽게 소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고작 여섯 곡이 발표되었을 뿐이지만 앞으로 커리어가 진행됨에 따라 이 같은 다재다능함과 상호호환성은 다양한 방식의 변신을 가능케 할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멤버들의 송라이팅 능력이다. 이미 케이팝 신에서 성공적인 작곡가로 활동 중인 벨은 이 앨범에서도 본인의 솔로곡인 ‘Countdown’을 비롯해 두 곡에 작곡가로 참여하고 있고, 쥴리, 나띠, 하늘 역시 작사뿐 아니라 탑 라이닝 작업에 적극 참여해 곡의 일관성을 높여주고 있다. (여자)아이들과 같은 셀프 프로듀싱 걸그룹을 표방하려는 의도도 있겠으나 궁극적으로 이 그룹이 지향하는 컨셉과 방향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룹의 이름에는 대개 그 팀이 지향하는 방향성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키스 오브 라이프와 동시대에 경쟁하게 될 4세대 걸그룹들을 예로 들어보자. 뉴진스는 새로움과 익숙함을 뒤섞은 타임리스한 보편성을, 아이브는 ‘나'라는 주체성과 독립성의 의미를, 르세라핌은 두려움에 맞서는 용기를 내세운다. 키스 오브 라이프 라는 이름은 일차적으로는 ‘인공호흡'의 뜻을 갖고 있지만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들을 의미하는데, 앨범 소개에서 이들은 그룹의 정체성을 ‘자아를 찾는 메시지'를 통해 이 작업을 수행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나를 찾아가는 자유로운 여정은 필연적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과거와 속박으로부터의 결별로 시작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앨범은 아주 치밀하고 설득적이다. 앨범의 대부분은 솔로 곡에 할애되어 있다. 데뷔 앨범으로서는 이례적인 시도다. 그런데 단순히 솔로곡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노래들이 가사뿐 아니라 뮤직비디오의 스토리 라인을 통해서 그룹 전체의 서사를 쌓아가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각각의 멤버가 본인의 개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펼쳐놓은, 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청춘의 네가지 이야기들은 결국 경쾌한 힙합 트랙인 ‘쉿'으로 귀결되는데, 이를 통해 솔로곡들의 존재가 훨씬 논리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와닿는다. 자연스럽게 멤버를 소개하면서도 음악적으로 그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되는, 서투르거나 억지스럽지 않은 구성이다.
음악은 세련미와 익숙함을 두루 갖추면서도 트렌디함을 놓치지 않는다. 최근 불고 있는 ‘Y2K’ 혹은 밀레니얼 레트로의 유행에 발맞추어 이들의 음악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R&B와 힙합의 다양한 요소들을 현대적인 취향에 맞춰 성공적으로 소환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케이팝 걸그룹들이 거의 공식처럼 거쳐 가는 교복 입은 학창 시절 콘셉트를 패싱하고 서구적인 틴에이저-영 어덜트의 이미지로 직행해 기존의 걸그룹과 차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케이팝의 가장 큰 시장으로 떠오른 미국을 비롯한 북미 시장이 주목할 만한 음악적, 미학적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균형감과 감성이다. 지금 언급한 개별적인 요소들은 사실 누구나 떠올리고 적용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결합하고 어느 정도의 수준과 뉘앙스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키스 오브 라이프의 데뷔는 새로운 시대의 걸그룹이 단지 좋은 재능의 기계적 조합이나 새로운 ‘선언'이 아니라 그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는 균형감과 감수성, 그러니까 절묘한 ‘레시피'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가장 어려운 방식으로 이 치열한 별들의 전쟁에서 차별화에 성공한, 의심할 여지 없이 올해 가장 빼어난 케이팝 앨범 중 하나다.
<사진 제공 - S2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