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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첨단의 사운드와 흥미로운 이야기를 앞세운 빌리의 역습

<EUNOIA>의 첫인상은 얼핏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 하지만 그 세련된 담백함이 귀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순간 우리는 곡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이 참신하게 리프레시 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flip flop, flip flop"으로 대표되는 이 곡의 후크 파트는 키치적 미학으로 승부했던 <GingaMingaYo (the strange world)>라든지 강렬한 록 사운드 자체가 장르적으로 돋보였던 <RING ma Bell (what a wonderful world)>과는 확연히 다른 방향성을 가진 곡이다. 중독적이지만 유치하지 않고, 가볍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다. 케이팝 신에서 빌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the Billage of perception: chapter three]는 케이팝이 들려줄 수 있는 가장 첨단의 사운드와 가장 정교한 스토리텔링이 조화를 이룬 유니크한 작품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대로 빌리가 내세우는 차별성의 가장 큰 부분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서사에서 비롯될 것이다. 케이팝 팬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콘셉트'나 '세계관'과는 조금 다른,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매번 아주 조금씩 그 실마리를 드러내며, 이 이야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추측과 다양한 상상을 통해 '빌리버스'라고 불리는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어 그 실체를 그려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왜'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때보다 치열한 4세대 걸그룹의 경쟁 속에서 빌리(Billlie)의 실험과 도전은 다소 무모한 듯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 중에서 빌리의 방법은 더 많은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빠른 히트가 아닌 연속성에 의한 평판을 더 중요한 가치로 삼는 듯한 이들의 방법론은 일반적인 대중음악으로서나 케이팝으로서나 공히 리스키하다. 하지만 대중음악은 늘 과잉과 괴팍함, 나아가서는 쓸데없어 보이는 시도를 통해서 그 동력을 확보해오곤 했고, 시작의 작은 차이는 나중에는 큰 격차로 귀결되곤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스틱스토리와 빌리가 함께 구축해 온 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는 그 세계에 기꺼이 몸 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즐거운, 몇 번을 타도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놀이기구이며, 평론가들에게는 의아함과 호기심 사이에서 미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된다. 




 

빌리의 새 앨범은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고급스러운 사운드의 조합과 나열이다. 소리의 경험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빅4'라 불리는 메이저 기획사들의 음악에 비해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중소 기획사인 미스틱스토리의 위상을 감안했을 때에는 그 욕심과 근성이 느껴지는 결과물이다. SM과 JYP의 히트곡들을 다수 작곡한 프로듀싱팀 PixelWave, 작곡가 이우민, 밍지션 등이 참여한 곡들은 <enchanted night ~ 白夜>와 같은 복고풍의 디스코 그루브나 <lionheart (the real me)>의 라틴 힙합 비트 등에서 잘 드러나듯 현재 시장에서 선호되는 다양한 레퍼런스를 두루 차용해 트렌디함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다만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 유행하는 이지리스닝의 계열의 친숙함이 아닌 세련미와 정교함을 두루 갖춘 고급스러움을 특징으로 삼는다. 동시대에 경쟁하는 수많은 케이팝 걸그룹 가운데 빌리가 보여주는 차별성은 심지어 팬송인 <various and precious (moment of inertia)>에서조차 일관되게 드러난다. 팬송이라고 하면 보통 편안하고 무난한 음악들과 분명한 메시지가 떠오르지만 이 노래는 그 틀을 여지없이 부수어 버린다. 몇 년 전 그들이 내놓은 싱글 <snowy night>이 떠오르는, 시종일관 예측하기 어려운 세련된 보이싱이 귀를 간지럽히고, 멤버들 전원이 참여한 노랫말은 빌리가 갖고 있는 신비로운 콘셉트와 잘 어울리는 아름답고 참신한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고 보니 아직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빌리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와 음악의 본질이 아직 그 정체를 모두 드러내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적어도 이들이 무엇을 의도하는지에 대해 [the Billage of perception: chapter three]는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확실한 건 이들이 새 앨범을 통해 서사적인 면에서나 음악적인 면에서 작지만 유의미한 차이를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입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의식적인 구별짓기가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지만 그것이 확실한 비전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결국 '무엇'만큼 중요한 것은 '왜'와 '어떻게'다. 그리고 아티스트의 음악적 진정성은 메시지나 주장이 아닌 일관성에서 나온다. 빌리의 행보, 그리고 빌리를 통한 미스틱스토리의 행보는 적어도 그 부분에서 성공하고 있다. 

 
<일러스트 - HN.U, 사진제공 - 미스틱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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