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강렬하게 떠오르는 과거. 어제처럼 또렷하게 기억되는 몇몇 순간들은 마음속에 남은 채로 우리의 일부가 되어 살아 숨 쉰다. 어떤 기억은 떠올리기만 해도 힘들지만, 파편처럼 남은 감정과 서사는 긴 시간 동안 조금씩 소화되며 나아진다.
지나간 시간과 어느 정도 화해를 하고 나자 보이는 건 화면을 덮은 어지러운 뉴스 헤드라인들. 우리를 둘러싼 사회는 점점 분열되고 미움이나 혐오의 힘에 잠식당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는 사치로 여겨지는 시기에, 저스디스가 새 싱글을 들고 나타났다. 어둠 속에 묻혀도, 질세라 목청을 높이는 노래들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VIVID]. 빛은 어두운 곳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 어둠과 고통 속에서 더욱 빛나는 내면의 노래들은 결국 우리를 앞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1. [RSK] 근황을 궁금해한 팬들이 많아요.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최근 건강검진을 했는데 폐기종 진단을 받았어요. 턱관절 장애와 폐기종을 가지고 어떻게 뮤지션 생활을 잘 병행할 수 있을지 계속 다양한 치료법을 시도해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2. [RSK] 싱글 앨범 [VIVID]가 공개되었죠. 어떤 앨범인지 소개 부탁드릴게요.
저는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뮤지션들이 해 온 것을 답습하는 것도 싫고, 제가 이미 했던 것을 다시 하는 것은 더더욱 싫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어떤 랩 스타일로 풀어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올해 초 아프로비츠를 많이 들을 때였는데, 이런 리듬 위에서 자기 이야기를 화려하게 푼 사람이 있었나, 내가 해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프로듀서 일루이드 할러(ILLUID HALLER)에게 컨택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3. [RSK] 예전에 발매한 곡 [SsEeOoUuLl Pt. II]는 서울, 공연장, 베트남 등의 로케이션에서 촬영된 바 있죠. 이번 뮤직비디오는 어디서 촬영했어요?
이번 비디오에는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노원구 상계동에서 촬영된 장면들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촬영 현장에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영상으로 확인하면서 아파트랑 상가랑 골목들까지 전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게는 비비드한 기억들을 되살려주는 비디오입니다.
4. [RSK] 앨범 혹은 뮤직비디오 작업 과정 중에서 생긴 인상적인 에피소드들도 있을까요?
일루이드 할러와 작업하고 비트가 완성됐을 때, 제가 초안을 앉은 자리에서 1시간 반 만에 작업했습니다. 벌스 3개가 그렇게 순식간에 나온 것도 처음이었고 신기했는데, 이 이야기들이 다 어디 숨어 있다가 이 비트에서 하나로 합쳐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일루이드 할러에게 ‘내 안에 떠다니던 이야기들이 이 비트를 통해 완성된 것 같아서 고맙다’라는 식으로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5. [RSK] 이전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VIVID]는 어떤 새로운 시도나 실험을 담고 있나요?
그래미 노미네이트 됐었거나 위너인 프로듀서와 엔지니어분들과 전 트랙을 작업한 건 처음이에요. 또한 가사의 수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순이 님이 제 진심을 알아 봐주시고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6. [RSK] 매번 칼날처럼 예리한 가사를 쓰시죠. 이번 앨범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담긴 가사는 무엇일까요?
‘얘넨 진실을 원하는 척하나
사실은 자신의 진실이 진실이라 위안받고 싶은 것뿐임을.’
저도 모르게 떠올렸던 이 라인이 곡의 마침표를 찍어줬습니다. 다른 창작자분들 중에서도 공감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머릿속 어디선가 떠다니던 이야기들이 적시에 등장해서 작품을 완성해 주는 경험은 언제나 짜릿한 것 같아요.
7. [RSK] [VIVID] 외에도 올해 싱글 앨범 [GOAT], [Diss-a-point], [SsEeOoUuLl Pt. II]도 발매했어요. 마음속으로 순위를 매겨보자면 어떤 앨범에 가장 애정이 가나요?
발매될 앨범의 방향성으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VIVID], [Diss-a-point], [SsEeOoUuLl Pt. II], [GOAT].
8. [RSK] 팔로알토와 함께한 <Cooler than the Cool>에서는 현시대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각을 통해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바 있죠. 어지러운 사회를 보면서 요즘은 어떤 생각을 많이 하시나요.
<Cooler than the Cool> 때처럼, 저에게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앞으로의 제 음악 안에 그 답이 있었으면 합니다.
9. [RSK] 또한 현재 힙합 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해요.
사회적 트렌드의 변화, 플랫폼의 변화, 그리고 소비자들의 구매 행동 변화 등 복합적인 현상들이 많기에 한 주제를 꼬집어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씬의 돈과 규모, 아티스트들의 인기와 에너지가 줄어든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저는 사랑으로 뛰어든 사람이기 때문에, 여전히 제 자리에서 같은 것을, 다른 환경에서 해 나갈 뿐입니다.
10. [RSK] 칸예 웨스트의 팬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지난 8월에 열렸던 [VULTURES 2] 리스닝 익스페리언스에 가셨나요?
이 질문에 정말 솔직하게 답을 드려 보자면, 저는 그 사람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아티스트이고 저의 음악적 영웅이고를 떠나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가끔 괴롭습니다. 그래서 리스닝 파티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감히 판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그의 예술에서 긍정적인 영감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마주하고 싶습니다. 루페 피아스코가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칸예를 언급하며 “At the end of the day, I just want him to be happy”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했는데, 이 내용은 유튜브에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영상을 보면서 많이 공감했습니다.
11. [RSK] 플레이리스트에 담긴 곡도 궁금해요. 요즘 자주 듣는 것들은 뭐예요?
작년부터 Billy Woods의 [Aethiopes]와 [Maps]를 로테이션으로 몇 번째 듣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Maps]는 새로운 [Madvillainy]라고 생각합니다. 신선하면서도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그만의 스타일과 리릭시즘. 현재 지구상에서 랩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올해 들은 앨범 중에서는 Marsha Ambrosius의 [Casablanco]가 최고였습니다. 죽기 전에 돈을 진짜 많이 번다면 이런 프로덕션의 앨범을 꼭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2. [RSK] 랩이 아닌 형태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현재, 이 질문을 받는 시점에서는 랩밖에 없습니다. 턱이 아파도 저는 여전히 랩이 가장 즐겁습니다.
13. [RSK] 지금까지 이룬 성취를 하나의 챕터로 본다면, 다음 챕터의 제목은 무엇이 될까요?
예술은 혼자서 존립할 수 없고, 그걸 소비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갖고 싶은 것을 가졌고, 그것을 가지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는 챕터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함께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잃어버림’을 표현함으로써 다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다음 챕터의 제목은 ‘Lost In Translati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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