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이 그동안 들려줬던 노래는 힙합에 가까웠다. 키드밀리, dress와 함께한 <Bittersweet>에서의 강렬한 모습으로 ron을 기억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인디고 뮤직 합류 후 힙합, 알앤비, 팝 장르의 작업을 이어온 그가 본래의 얼터너티브 성향의 색채를 강조한 앨범, [下中上]을 꺼내놓았다. 새 앨범 속 ron은 신선하고도 낯설다. 그러나 여태껏 봐온 얼굴 중 가장 자유롭고, 즐거워 보인다.
이리저리 나뒹구는 감정들을 바라보며 적은 것들. 이 기분을 거쳐 저 기분으로 옮겨 가는 나날들이 솔직하게 담긴 [下中上]. 그가 마련한 공간에 들른 나는 한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해본다. 다들 이렇게 사는구나 하며.
1. [RSK] 길었던 여름이 가고 겨울이 다가왔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겨울이거든요. 겨울을 기다리며 설렘 속에 지내고 있습니다.
2. [RSK] 인스타그램을 보니 여러 번 등장하는 이미지가 있던데요. 짙푸른 하늘,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예요?
비행기가 발명된 시절의 사람들은 하늘을 난다는 사실을 꿈처럼 느꼈을 것 같아요.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거고요. 상상 못 했던 것을 직접 경험할 때 느끼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인생과 겹쳐 보여요. 사랑에 빗대어 표현하면 만남과 이별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시간과 감정들. 이런 장면 뒤로는 하늘이 조용히 흘러가죠. 매번 다른 모습으로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보이는 비행운도 참 예뻐요. 시간이 흐른 기록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감상적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이유로 비행기와 하늘을 좋아해요.
3. [RSK] 새로운 EP [下中上]으로 돌아오셨어요. 어떤 앨범인지 소개 부탁드릴게요.
청중을 고려하고 만든 앨범이 아니에요. 일기처럼 쓴 노래로 이루어진 앨범입니다.
4. [RSK] ‘상중하’라는 어감이 익숙하기에 이번 제목이 독특하게 느껴져요. 타이틀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나요?
보통 상중하를 세로로 표현하면 상이 맨 위에, 소위 말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잖아요. 그와 반대로 저는 텐션이 가라앉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편이에요. 하늘보다 지구에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기분의 높낮이를 기준 삼아 트랙 리스트를 구성했어요. 보통 세로 순으로 적게 되니, 이번 앨범에서는 하(下)는 <정>, 중(中)은 <Classic>, 상(上)을 <how easy>로 보시면 될 거 같아요.
5. [RSK] 이번 음악은 그동안 인디고 뮤직에 소속되어 전개했던 힙합 사운드와 결이 달라요. 얼터너티브 곡들만 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에요?
저는 얼터너티브 음악을 듣고 자랐기에, 이런 음악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어요. 어쩌다 좋은 기회로 [Cliché]라는 앨범에 참여한 거였는데, 어느 순간 제가 힙합 알앤비를 하는 가수가 되어있었어요. 힙합, 알앤비, 팝 장르의 음악을 만들 때는 외주 작업을 하듯 ‘일을 한다’라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인디고 팬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과 의무감이 앞서다 보니 음악이 재미없어진 시기도 있었죠. 노래를 찾아 듣는 일도 공부처럼 느껴졌고요. 그래서 공백이 길어졌네요.
요즘은 음악이 너무 재밌어요. 음악을 처음 시작하는 기분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해요. 남들이 뭐라 하건, 제 음악 활동의 본질은 ‘재미’거든요. 이번 앨범을 통해 순수한 즐거움을 되찾아서 기분이 참 좋습니다. 하하.
6. [RSK] 앨범에는 자신만의 음악을 찾는 여정이 담겼다고 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어떻게 극복했어요?
어려운 점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앞서 말했듯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재미있게 만들었거든요. 골머리 싸매는 기분 전혀 없이, 놀이처럼요. 그리고 사실 <how easy>는 제가 처음으로 혼자 만든 노래예요. 원래 기타와 보컬이 각각 한 트랙만 있었는데, 멋진 친구들의 도움이 가미되면서 사랑스러운 곡이 나왔어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작업할 것 같네요. 최고의 극복은 역시 인복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요.
7. [RSK] 전체적으로 감상은 덜어낸 채 담담하게 읊조리는 듯한 가사가 인상적이었어요. 평소 성격도 이성적인 편인가요?
아뇨. 저는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말실수도 엄청 많이 하고…(웃음) 그럴 때면 집에서 혼자 감정이나 행동, 기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요. 저는 스스로에게 살가운 편은 아니거든요. 때로 자학에 빠지면 괴롭지만, 이성적인 자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는 편이에요.
그리고 집에 홀로 있으면 저 자신이랑 대화하는 기분이 들잖아요. 가사는 그놈이랑 같이 쓰는 것 같아요. 가사 검수도 걔가 하고. 사실 제 가사가 그다지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렇게 느끼셨다니 이제 좀 어른이 됐나 봐요.
8. [RSK] EP의 첫 번째 곡 <정>이 좋아서 지금도 반복 재생해서 듣고 있어요. 이 곡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26살 무렵 서울살이가 무척 외롭게 느껴졌어요. 어릴 때 가까웠던 친구를 오랜만에 봤는데, 단둘이 있는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갑작스러운 이별도 겪었어요. 이런 일들의 원인은 절대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모든 이유는 내가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죠. 결국 영원한 건 없음을 체감하면서 우울함에 빠져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 일기처럼 쓴 곡이 <정>인데요. 이 노래가 제 치부를 드러내는 듯 해서, 세상에 내놓기에 부끄러워요. 징징대는 것 같아서 가끔 귀엽게 들리고요. 이 노래는 기분의 높낮이 중에서 ‘하’에 속해요. 제일 못난 모습 혹은 쪽팔린 생각이 담긴 곡입니다.
9. [RSK] 두 번째 곡 <Classic>도 구체적인 상황에서 떠올린 곡 같더라고요. 이 곡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앞 트랙보다는 차분해진 기분이 들어요. ‘원래 다들 이러고 사는 거지 뭐’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밌는 건 이 노래를 <정>보다 훨씬 전에 만들었어요. 24살 때였나. 예전 여자 친구와 영화를 많이 봤는데, 두 시간이 넘도록 영화를 고른 기억이 있거든요. 상대방이 보고 싶은 작품이면 뭐든 좋다고 말하면서도, 제안한 영화 대신 다른 건 어떠냐고 회유하는 게 웃기지 않나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영감받아 쓴 곡이에요. 연애할 때 취향이 같으면 좋죠. 근데 결국 취향이라는 벽에 갇히게 되는 것 같아요. 릭 루빈(Rick Rubin) 같은 아저씨들은 ‘나는 취향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다’라고 하는데 저는 그 의미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쉬운 예를 들자면 ‘너 이상형이 뭐야?’라는 질문 많이 하잖아요. 근데 전 진짜 이상형이 없거든요. 그냥 갑자기 ‘예쁘다, 좋다’라는 생각이 찾아올 뿐이지. 그런 의미에서, <Classic>에 나오는 가사 중 ‘너의 취향을 알기엔 난 책갈피가 없고, 이제 알겠다 싶으면 다른 책을 읽고 있어 넌’이 맘에 들어요.
10. [RSK] <how easy>는 꿈을 꾸듯 전개돼요. 가사처럼 모두가 동시에 꿈에서 만난다면 어떨 거 같아요?
모든 사람이 같은 꿈에서 만나서 딱 한 시간만 하고 싶은 대로 산다면,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을 많이 아끼잖아요. 예의를 벗어날까봐 혹은 내 생각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요. 저는 한국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이 관습에 적응이 안 되고, 고통스럽기만 해요. 예전에 누군가와 삶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중, ‘민승아 그건 좀 선 넘지’라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선을 허물려고 대화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과 동시에 입을 다물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게 됐어요. 절대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고요.
요즘, 건물의 창문은 점점 더 불투명해지고, 타인의 시선을 차단한 채 각자의 세상에서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모두들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기 위해 현실에 타협하는 거겠죠. 사람들이 이 노래 가사처럼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존 레논(John Lennon)의 <Imagine> 노래를 들으면 그런 감정이 느껴지잖아요. <Imagine>에 답가를 쓴다고 상상하며 만든 곡이 <how easy>예요. 존 레논이 말하는 세상은 실현될 수 없겠지만, ‘나도 너와 같은 상상을 한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11. [RSK] 앨범 아트워크 얘기도 해볼까요. 이 이미지는 [下中上]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나요?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를 엄마라고 칭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요. 이 그림에서는 어머니의 치맛바람 속에 얼굴이 가득한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치마 안에 있는 얼굴들은 다들 무언가를 외치고 있거나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보이고, 그 밖에 동떨어진 얼굴들은 오히려 편안해 보이더라고요. 사람의 형태를 한 빨간 것들은 한이 맺혔지만, 아무 말도 전할 수 없는 귀신 같고…(웃음)
인스타그램 검색 탭에서 이 그림을 처음 봤는데, 보자마자 끌렸어요. 독일에 사시는 환경 운동가 겸 예술가인 할아버지의 작품이었어요. 아트워크로 쓰고 싶다고 제가 연락드렸는데 너무 감사드리게도 공짜로 써도 된다고 하시면서 보내주셨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 꼭 그 할아버지 전시를 보고 싶어요.
12. [RSK] 이번 앨범 작업을 통해서 어떤 생각 혹은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궁금해요.
모든 예술, 아니 모든 삶에서 의도가 제일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요즘 같이 작업하는 친구랑 미니멀리즘에 빠져있는데요. 뜻이 분명하면 음악이나 도화지에 그저 간단한 음이나 줄 하나만 그어도 훌륭한 작품이 된다고 생각해요. 마크 로스코 그림처럼요. 반면 요즘 자기 계발 영상을 보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라’라는 말을 하잖아요. 저는 그게 이해 안 가더라고요. 의도 없는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얼마 전에 친구가 ‘생각을 물수제비라고 상상해 봐, 갈 수 있는 만큼 많이 튀겨보고 어느 순간 잠기게 된다면 그대로 내버려둬.’라는 근사한 말을 해줬어요. 이처럼 깊숙이 빠져들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가능한 한 깊이 생각해본 뒤에 쉽게 버리고 싶어요. 생각을 음악으로 표현할 때도 너무 멋진 옷을 입히려고 집착하고 싶지 않고요.
13. [RSK] 평소 자주 듣는 곡도 얼터너티브 장르인가요? 요즘 좋아하는 음악을 소개해 주세요.
최근에 제일 많이 듣는 음악은 The Smile의 신보예요. 모든 트랙이 좋아서 특정한 곡을 뽑기는 어렵네요. Portishead의 [Portishead] 앨범도 정말 좋아해요. 찢어질 듯한 노이즈와 드럼, 베이스 하나로 주는 느낌이 엄청납니다. Ml buch의 [Suntub] 앨범도 많이 들었어요.
14. [RSK] 몇 달 전 인스타그램 피드에 책을 올리셨어요.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이 문장을 곱씹게 되더라고요. 어떤 책인가요?
밀란 쿤데라의 <느림>이라는 책이에요. 저는 쿤데라 책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이성적인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정말 재밌더라고요. 저 책에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이 문장이 참 인상 깊었어요. 정치인을 춤꾼이라고 표현한 것도 웃기고.(웃음) 밀란 쿤데라의 <웃음과 망각의 책>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서 추천드려요. 참고로 저는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게 좋아요.
15. [RSK] 벌써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이 인터뷰가 끝나면 뭘 하실 생각인가요?
알바하면서 인터뷰 답변지를 쓰고 있는데, 이제 퇴근하면 집에 가서 또 기타를 깨작거리고 있지 않을까요. <기생충>에 나온 명언처럼 ‘무계획이 계획’이에요.(웃음) 오늘 질문들이 참 재밌었습니다. 감사드려요.
Photographs by Indigo Mus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