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상상, 그리고 슬픔과 기쁨. 끝과 끝에 자리한 단어들 사이를 이리저리 유영하는 뮤지션, 파일랫을 만났다. 여러 가지 모양과 질감의 감정을 자신만의 음악으로 재창조해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를 선보일, 음악이라는 우주의 새내기 비행사 파일랫과 나눈 반짝이는 이야기.
1. [RSK] 안녕하세요 파일랫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기소개와 인사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롤링스톤 코리아 독자 여러분! 저는 노래하는 파일랫(pylat)이라고 합니다.
2. [RSK] 파일랫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참 독특하던데요.
어릴 때 저는 꿈이 정말 많았어요. 어른이 되면 매일매일 제가 원하는 직업으로 바꿔서 살 수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초등학생 때 하루는 '우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꿈을 우주비행사라고 적어냈어요. 저는 하나에 집중하기보다는 여기저기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고, 지금도 그리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고 싶고요. ‘pilot(파일럿)’의 어감도 좋지만, ’pylat(파일랫)’이라는 단어도 담백하고 재미있는 것 같아서 파일랫으로 지어보았어요.
3. [RSK] 대학원에서는 국제관계학 석사 과정을 마쳤죠? 음악과 거리가 먼 전공인 만큼, 어떤 계기로 음악을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해져요.
음악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음악과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동아리 공연이든, 대학교 축제든, 공연할 기회가 있으면 참여하려고 했어요. 공연에서 노래를 할 때에는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 순간이 너무 소중했거든요. 평소에도 살아 있다는 사실은 똑같은데 공연하는 순간에 유독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대학원 과정 동안에도 아카펠라 동아리 활동이 유일한 숨 쉴 틈이 되어주었어요.
부모님께서 음악을 매우 사랑하시는 분들이라서 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접했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클래식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중학생 때 Alicia Keys의 음악을 듣고 나서부터 R&B, 소울을 많이 듣기 시작했어요. 최근에는 프로듀서 LOA를 통해 재즈와 어쿠스틱을 접하면서 더 많은 장르를 좋아하게 됐어요. 장르에 관계 없이 제 귀에 좋은 음악을 좋아하고, 실제로도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4. [RSK] <편지>에서는 사랑할 때 느끼는 시간의 속도를, <우주먼지>에서는 한없이 크게만 보이는 사랑하는 이를, <슈가>에선 설탕보다 달콤한 사랑을, <홈스윗홈>에선 행복하고 따뜻한 집을, <버스>에선 여행의 기분을 노래할 만큼, 파일랫 님의 노래는 꾸준히 행복을 이야기해왔어요. 지금까지는 기쁨이 중심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새 EP 앨범 [BREATHE]는 슬픔이 중심인 것 같아요.
그동안 기쁨이 슬픔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사람들 앞에선 웃는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요. 그런데 지난 겨울부터 공황장애와 불안장애를 겪으면서, 체력이 너무 빨리 소진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힘들어졌어요. 웃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시기도 있었고요.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숨이 가빠지는 증상이 나타나니까 모른 척하거나 도망칠 수 없었고, 약해지고 작아진 제 모습을 똑바로 마주해야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 덕분에 저라는 사람을 더 알게 되었고, 제가 왜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알게 되었어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더라고요. 살아있다는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요. 이번 앨범은 저에게 숨이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 동안, 좁고 기다란 숲을 걸어 나오면서 만들어졌어요.
5. [RSK] 음악을 통해서도 괴로운 상황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겠네요.
작년 겨울 어느 날, 공연장에서 공연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어요. 그 순간에는 저를 둘러싼 공간에 있는 모든 색깔들이 저를 공격하는 것 같았어요. 그 뒤부터 약을 처방받아서 몸 관리와 마음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런데도 아직 공연을 할 때나 곡 녹음을 할 때 가슴이 갑갑해지고 심장이 빨리 뛸 때가 있어서 그럴 때는 많이 속상해요. 저는 음악을 할 때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그 설렘이 긴장으로 다가올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녹음을 하거나 공연을 하는 날에는 스스로에게 잘 해달라고 부탁하는 마음으로 해요. 불안장애도 결국은 긴장되는 상황들을 직접 차근차근 부딪히면서 이겨내야 된다고 해요. 이번 앨범을 만드는 내내 저는 약해진 제 모습과 부딪혀야 했고, 그 시간 덕분에 저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약해진 제 모습도 끊임없이 보살펴주고 사랑해 준 사람들 덕분에 이번 앨범을 발매할 수 있었어요.
6. [RSK] 앨범 아트웍에도 어두운 분위기가 잘 드러나있어요.
공황 증상이 있을 때, 실내 실외할 것 없이 제 주위 환경이 갑자기 갑갑하게 느껴졌어요. 주변에 있는 색깔들이 저를 공격하는 것 같아서 차라리 주변이 모두 검은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요. 1%의 빛도 없는 완전한 검은색이요. 그러면 눈을 감거나 자리를 피하지 않아도 아늑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난번 7월에 발매했던 싱글 [BUS]에서도 함께해 주셨던 일러스트레이터 누약(@heynooyag) 님께서 아트워크에 참여해 주셨고, 시각적 자극처럼 다가오는 색깔들 사이에서 저를 안아 올려주는 듯한 따뜻하고 아늑한 검은색을 표현해 주셨어요.
7. [RSK] EP 앨범 [BREATHE]는 첫 실물 앨범이 됐어요. 텀블벅 후원도 목표금액을 넘어섰고요. 많이 떨리는 시간이었을 것 같은데 기분이 어때요?
사실 텀블벅을 시작할 때 걱정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EP 앨범을 준비할 때 트랙 별 라이브 세션(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건반), 뮤직비디오 촬영, 믹싱, 마스터링 등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텀블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요. 70명이 넘는 분들께서 후원을 해주시고 목표금액을 넘게 되어서 감사하게도 무사히 앨범을 제작할 수 있었어요. 다 끝나고 난 지금은, 더 솔직하고 좋은 음악으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8. [RSK] 텀블벅에서 공개한 굿즈의 종류가 정말 다양해요. 틴케이스 성냥부터 찾아가는 1:1 공연까지요. 색다른 아이디어가 잘 드러났는데, 누구의 아이디어인가요?
텀블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LOA와 함께 기획하고 진행을 했는데요. 3번 트랙인 <Nightmare (Feat. SLEEQ)>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 촛불과 성냥을 소품으로 활용했었어요. 빈 공간 프로젝트 촬영 팀과 함께한 뮤직비디오 작업이었는데, 시각적 자극 없이 불을 모두 끄고 촛불에 의지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아늑하게 느껴졌고, 제 앨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서 소품으로 촛불과 성냥을 활용했었거든요. 그때 영감을 받아서 알아보다가, 'PRESH'라는 리빙 브랜드와 협업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원했던 수량이 많은 수량은 아닌데도 PRESH에서 흔쾌히 컬래버레이션을 해주셨고, 그렇게 ‘BREATHE’ 캔들, 성냥이 탄생했어요. 찾아가는 1:1 공연의 경우에는 고액의 후원자들을 위해 5명에게만 한정시킨 굿즈였는데요. 감사하게도 선택해 주신 후원자분들이 계셔서 700만 원이라는 큰 금액을 달성할 수 있었어요. 굿즈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저희끼리 엑셀 파일도 만들어보고, 텀블벅 경험이 있는 친구들에게 자문도 구해보고,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던 것 같아요.
9. [RSK] 앨범 굿즈에 ‘드림 노트’가 포함돼있어요. 자고 일어나서 꿈을 기록하는 용도라고요. 평소 꿈을 자주 기록하는 편인가요?
저는 희한한 꿈을 많이 꿔요. 그럴 때마다 '무의식 속에 이런 생각이 숨어 있었나' 싶어서 꿈을 자주 기록해요. 언젠가 노트를 펼쳐 보면 뜬금없이 영감이 되어주기도 하고요. 지금 기억나는 꿈은 제 친구가 갑자기 햄스터가 되어서 그 친구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는데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어떤 도시에 도착하는 거예요. 최종 종착지는 중국이었어요. 그런데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초코 케이크랑 귤이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들어오고...(웃음) 아무튼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햄스터(친구)랑 지하철에서 이것저것 신나게 먹었어요.
이렇게 웃긴 꿈만 꾸면 좋겠지만 사실 올해 공황 증상이 심할 때는 생생한 악몽을 많이 꿨어요. 꿈속에서 고통이 실제처럼 느껴지고 공포가 느껴졌고요. 잠에 들 때마다 '어떤 재미있는 꿈을 꿀까'하며 신났던 제가, 생생한 악몽을 계속 꾸다 보니 잠들기도 무섭고 어떤 꿈을 꿀지 무서워지더라고요. 그래서 ‘드림 노트’에 즐겁고 행복했던 꿈을 적어놓는 일상이 제게도 소중해져서 앨범 굿즈로 탄생시키게 되었습니다.
10. [RSK] 앨범은 ‘키트 앨범’ 형태로 제작을 했다고요.
키트 앨범은 미래에 CD를 대체할 매체로 지목되고 있는 형태의 앨범이에요. KiT(키트)는 'EUWC'(비가청 주파수 데이터를 전송하여 앱을 활성화하는 특허 기술)를 이용하는데, 손바닥보다 작은 네모난 키트의 스위치를 휴대폰의 마이크 부분에 클릭하기만 하면 음원, 디지털 이미지, 뮤직비디오를 한 번에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 CD보다 편리하게 휴대폰으로 훌륭한 음질의 음원을 접할 수 있어서 키트 앨범 형태로 첫 피지컬 앨범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휴대도 간편하고 예뻐서 결과물은 정말 만족해요!
11. [RSK] 수록곡 <Nightmare>에서는 SLEEQ 님이, <Lullaby>에서는 Hodoo 님이 피처링에 함께했어요. 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SLEEQ과 Hodoo와는 평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요. 당시 제가 <Nightmare>라는 곡을 만들 때에 새벽에 방 안에서 혼자 읊조리는 듯한 느낌으로 슬릭의 나른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랩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Lullaby>라는 곡을 만들 때에는 Hodoo의 야외 밤공기가 섞인 느낌의 담백한 랩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협업을 부탁드렸을 때 두 분 다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고, 두 분 다 제가 원했던 느낌과 시적인 가사로 피처링을 완성해 주셨어요.
12. [RSK] 작곡과 편곡에서 늘 함께하시는 LOA 님은 파일랫 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저희를 팀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은데, 팀은 아니고 프로듀서 LOA와 싱어송라이터 pylat의 협업이에요. LOA는 제 모든 곡에 함께해 준 프로듀서이자 재즈 기타리스트이고, 제게 영감과 추진력을 주는 존재예요. 원래는 LOA한테 기타를 배웠었는데, 몇 개월 만에 흥미를 잃고,(웃음) LOA가 기존에 만들었던 곡을 들려줬는데, 곡들이 너무 좋아서 제가 새로 곡을 같이 만들자고 했어요. 같이 놀다가 잼 형식으로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 때도 있었고요. 그럴 때마다 저는 정말 재밌고 신나서 춤을 추기도 해요. LOA 덕분에 재즈도 많이 좋아하게 됐어요. 저는 아이디어가 많지만 일을 벌이고 나서 끝맺음을 어려워하는데, LOA는 저보다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성격이라 무언가를 세상에 구현하고 실행하는 데에 탁월해요. LOA가 매번 꼼꼼히 디렉팅을 해준 덕분에, 처음에는 음원을 녹음할 때 마냥 두려웠었는데 그런 부분도 많이 나아졌어요.
13. [RSK] 기쁨과 슬픔, 파일랫 님의 이다음 곡은 어떤 곡이 될까요?
누구에게나 기쁨과 슬픔은 공평한 순환으로 반복된다고 믿고 싶어요. 물질이나 자본은 공평하지 않더라도 기쁨과 슬픔 같은 감정은 모두에게 공평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스스로 그런 사이클을 인지하고 있으면, 기쁠 때도 슬퍼질 준비를 할 수 있고 슬플 때도 기뻐질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일 어떤 감정을 느낄지 모르지만, 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가 느끼는 것들을 계속 음악으로 만들고 싶어요.
14. [RSK] 벌써 마지막 질문이에요. 뮤지션으로서 파일랫 님의 꿈을 알려주세요.
단숨에 흥미를 가졌다가 급격히 흥미가 떨어진 적이 많아요. 제 MBTI가 ENFP거든요. 최근에는 발레복은 잔뜩 사두고서 정작 발레 수업을 3번 가고 흥미를 잃었어요. 그래서 사실 LOA와 음악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할 때 저는 제가 음악 만드는 일을 꾸준히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음악을 꾸준히 좋아해왔고 소중히 여겨왔으니 앞으로도 제가 느끼는 것들을 음악에 녹여내는 것이 꿈이에요. 그러려면 지치지 않아야 하겠고, 지치지 않으려면 무리하지 않아야 하겠고, 무리하지 않으려면 즐거워야 할 것 같아요. 음악을 할 때 설레고 즐거워하는 뮤지션이 되고 싶습니다.
<사진제공 - 전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