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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세계관 열풍, 설정이냐? 음악이냐?

어느 날 마을에서 사라진 소녀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추리극, 사이좋은 학창 시절을 보내던 소녀들의 숨겨진 비밀, 바다와 하늘이 무너진 미지의 세계 속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대모험... 최근 K-pop 신예 걸그룹들의 주요 세계관이다. 영화, 문학, 웹툰, 웹소설 시놉시스를 방불케 하는 이야기와 입체적인 설정이 음악, 퍼포먼스, 콘서트, 메타버스 등 다양한 영역으로 뻗어나간다. 다른 한 편에서는 담백하게 '좋은 음악'에 승부를 거는 그룹도 성과를 거둔다. 단숨에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할지라도 캐치한 멜로디와 친근한 콘셉트를 앞세워 인기 그룹으로 거듭난다. 세계관이냐 음악이냐. K-pop 걸그룹 앞에 놓인 두 갈래 길이다.   

꽤 오랜 시간 동안 K-pop에서 세계관은 보이그룹의 문법이었다. 2012년 데뷔 전부터 굵직한 티저 영상으로 거대한 프로젝트를 예고한 EXO(엑소)는 멤버 개인에게 초능력을 부여하며 '엑소학()'이라 불리는 대규모 세계관을 완성했다. 앨범 단위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며 차근차근 공감의 폭을 넓혀온 방탄소년단은 '화양연화'와 'Love Yourself' 테마로 현실 속 소년들이 꿈꿀 수 있는 가장 드넓은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이후 미지의 우주 행성 콘셉트를 응용한 B.A.P(비에이피), 청춘을 노래하며 장기 집권 중인 세븐틴, 국내 최초 K-pop 그룹 세계관 장편 영화로 데뷔한 P1Harmony(피원하모니)까지 대개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를 갖춘 대개 세계관으로 주목받는 쪽은 보이그룹의 경우가 많았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학교 3부작'을 선보인 여자친구, '루나버스'라는 제목의 야심 찬 프로젝트로 멤버 개인에게 데뷔 싱글을 부여하며 대서사시를 꿈꾼 이달의 소녀, '악몽'을 소재로 하여 강렬한 음악을 선보이는 드림캐쳐가 여성 그룹에게 세계관의 힘을 부여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걸그룹 세계관 유행을 불러온 팀은 aespa(에스파)였다. 

'광야'를 탐험하는 4인조, 아니 가상 아바타 아이(ae) 멤버들까지 총 8인조 그룹을 선포한 aespa는 K-pop 걸그룹의 세계관의 매력을 한껏 뽐냈다. SM엔터테인먼트의 거대한 컬처 유니버스(Culture Universe) 기획과 신세대 그룹을 향한 절대적 투자에 힘입어, 그들은 <Black Mamba>의 과감한 선언과 <Next Level>의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 극단적인 <Savage>까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aespa의 등장에 고무된 K-pop 기획사들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으나 묵혀두었던, 혹은 신규 개발 중이던 세계관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2022년 현재 K-pop 걸그룹들이 내놓는 고유의 서사가 예사롭지 않다. 기존 강자들과 더불어 신예들까지 촘촘하고 흥미로운 배경 설정 및 진행을 가져간다. 미스틱스토리의 첫 걸그룹 Billlie(빌리)는 미스터리 추리극을 주제로 두 가지의 평행 서사를 전개한다. '빌리'라는 소녀의 실종 사건을 탐구하는 멤버들은 현실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며 미지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Tag me(@)>, <After School> 등 한국 버전 틴에이지 현실 밀착형 판타지를 선보이던 Weeekly(위클리)는 신곡 <Ven Para>를 통해 월화수목금토일 일곱 멤버들이 스스로 우주 천체의 성주라는 새로운 운명을 자각하고 각성하는 과정을 펼쳐 보였다. 변화를 납득시키기 위해 유튜브 계정에 두 편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공개할 정도로 지금 그들은 세계관에 진심이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그룹 NMIXX(엔믹스)는 최근 K-pop 팬 사이서 가장 큰 화제를 불러온 팀이다. 이들은 데뷔 전 공개한 스토리 트레일러 '뉴 프론티어: 데클러레이션(New Frontier:Declaration)’을 통해 현실을 벗어나 염색체, 자연, 우주, 천체로 가득한 무의식의 '유토피아'를 찾아 나서는 모험극을 선언했다. 

음악도 설정에 적극 부합했다. 데뷔 싱글 [AD MARE]의 타이틀곡 <O.O>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제목과 더불어 완전히 다른 두 장르를 어떤 브레이크 없이 매끄럽게 이어 붙였다. 팬들은 이 곡을 'K-pop의 보헤미안 랩소디'라 부른다. NMIXX는 팝송, 대중적인 이미지에 집중했던 JYP의 새로운 도전이다. 꾸준히 메타버스 사업에 투자하며 신규 IP 개발에 집중하던 기획사의 행보가 매력적인 세계관과 입체적인 콘텐츠 적용이 가능한 걸그룹의 등장을 부른 것이다.

최근 K-pop에서 세계관은 필수 요소처럼 보인다. 다층적 서사와 유연한 변형 가능성을 제시하는 세계관을 통해 K-pop 그룹들은 음악과 퍼포먼스를 넘어 대중을 유입할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팬들과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하지만 모든 그룹이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 K-pop 관계자는 "세계관 구축 과정만큼 기획은 더욱 어려워지고 비용도 늘어난다"라 토로한다. 긴 시간 기획 과정에서 인력과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더 나아가 서사를 통해 2차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기획사가 세계관 사업에서도 유리하다. 중소기획사 그룹에서 세계관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다. 대신 이들은 확실한 돌파구를 찾는다. 음악과 퍼포먼스를 넘어선 어떤 것 대신,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는 방법이다.

카카오 산하 하이업엔터테인먼트 소속의 STAYC(스테이씨)는 복잡다단한 세계관 없이도 최근 가장 주가를 높이는 걸그룹이다. 그들의 옆에는 소속사를 설립한 작곡가 그룹 블랙아이드필승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트렌디한 멜로디로 히트곡을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블랙아이드필승은 STAYC에게 매력적인 <So Bad>, <ASAP>, <색안경><RUN2U>를 안기며 스트리밍 서비스 차트에서 호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들은 <ASAP> 역주행 전에도 무대 위에서의 핸드 마이크 라이브, 지속적인 메이킹 필름을 통해 꾸준히 노력하고 도전하는 서사를 쌓아나가며 히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fromis_9(프로미스나인)도 비슷한 사례다.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돌학교> 출신 그룹인 fromis_9은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에서 매니지먼트를 맡았으나 인기 중심에 선 그룹은 아니었다. 이들은 꾸준히 자체 채널 오리지널 프로그램 <채널나인>을 통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선보이며 <WE GO>, <Feel Good> 등 매력적인 디스코 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다듬었다. 지난 1월 17일 공개한 타이틀 싱글 <DM>으로 음원, 음반 모두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순항 중인 fromis_9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이라는 이점을 살려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또래들이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과 휴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IZ*ONE(아이즈원) 출신 장원영, 안유진의 합류로 화제를 모은 IVE(아이브)는 오디션 출신 멤버들의 높은 인지도를 신비로운 데뷔곡 <Eleven>과 함께 성공적으로 혼합하며 별도의 서사 없이도 높은 성과를 거뒀다. 엠넷 <걸스플래닛999>를 통해 데뷔한 Kep1er(케플러)<WA DA DA>로 성공적인 프로젝트 데뷔를 이뤘다. 세계관을 벗어던진 그룹도 있다. 쏘쓰뮤직 소속으로 활동했던 여자친구는 하이브 합류 후 솔직하게 욕망을 고백하는 마녀 콘셉트를 시도했으나 그룹 해체 후 VIVIZ(비비지)와 멤버 유주의 솔로 활동은 전과 같은 이지 리스닝 댄스 팝으로 돌아갔다. 데뷔 초 게임 요소를 도입하며 흥미를 부른 Cherry Bullet(체리블렛)은 얼마 가지 않아 쾌활한 콘셉트를 버리고 카리스마 있는 댄스 곡과 몽환적인 멜로디의 신스 팝으로 노선을 틀었다.  

걸그룹 세계관 확장은 계속된다. aespa는 '광야'를 탐험하며 사이버 세상의 모험을 이어나갈 것이고 NMIXX는 낙원을 향한 연금술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이브는 일찌감치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걸그룹 프로젝트와 판타지 웹툰 <크림슨 하트>를 예고한 바 있다. 다만 세계관이 성공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데뷔 전부터 확실한 콘셉트와 지향점을 갖추고 등장하는 최근 걸그룹들에게는 어려운 초기 기획과 대규모 자본 투자보다 확실한 후킹 요소와 팬들을 몰입케 만들 다양한 장치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전략 실행 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전제 조건이 있다. 좋은 음악이다. 아무리 근사한 세계관을 펼쳐 놓아도 음악의 힘이 약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납작하고 완결되지 않는 어정쩡한 설정보다 공들여 만든 히트곡이 오래 대중의 기억에 남는다. 세계관과 음악은 대결구도가 아니다. 상호 보완과 협력의 관계가 신선하고도 낯설지 않은 매력적인 그룹을 만든다. 

  

김도헌 / Kim Do Heon (대중음악평론가 Pop music critic)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제너레이트(ZENERATE) 운영.

 

 <사진 제공 - SM,JYP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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