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마마무의 소속사로 잘 알려져 있는 RBW가 DSP 미디어를 인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만큼은 타 엔터사 간 M&A 소식과는 다르게, 여러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최근 하이브나 카카오와 같은 레이블 편입의 케이스가 아닌, 100% 지분 인수에 따른 ‘소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나의 10대 시절을 관통한 1세대 아이돌 신의 대표 기획사였다. 주식매매계약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에이프릴이 해체되고 기존의 경영진들이 모두 떠나버린 지금, 이제 DSP 미디어는 찬란한 영광을 뒤로 한 채 간판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대성기획 시절 젝스키스와 핑클의 데뷔를 리얼타임으로 지켜보고 열렬히 응원해 온 입장에서, 이 기획사에게 느끼는 감정은 애증에 가깝다. 시대를 막론하고 소속 아티스트의 팬이었던 이들이라면, 아마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하이틴 시장을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린 공적은 확실하나, 정작 아티스트의 프로모션과 케어 측면에서 많은 빈틈을 보였던 회사임은 확실하다. 많은 이들이 2000년대 초반 SM과 DSP를 라이벌로 인식하곤 하지만, 개인적으론 젝스키스 팬 입장에서 H.O.T.의 한 발 앞선 파격을 항상 부러워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차이는 결국 두 기획사의 명암을 갈랐다. 팬들은 좋은 인재를 보유하고도 헛발질만 하는 경영진의 행보에 실망하며 발길을 돌렸고, 우후죽순 등장한 예비스타들이 그 환호를 나눠 가졌다. 대중들의 충성을 기대하기엔 KPOP 시장이 너무 커져 있었던 셈이다. 급변하는 흐름에 몸을 싣지 못하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된 DSP미디어. 아이돌 신의 태동을 알린 그들은 왜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럼에도 아이돌 시장에 기어코 남긴 그 유산은 무엇이었을까.
H.O.T.와 젝스키스, 무엇이 달랐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SM과 DSP의 행보는 두 대표그룹의 비교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젝스키스의 팬으로서 H.O.T.가 대단해 보였던 것은, 발매하는 앨범마다 확실한 콘셉트가 있다는 점이었다. 명확한 주제의식을 뒷받침하는 음악과 비주얼의 파격적인 결합이 10대들의 니즈에 부합했고, 거대한 문화적 트렌드로 변모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에 반해 젝스키스는 활동 기간 내내 명확한 지향점을 보여주지 못했고, 비주얼의 변화 역시 미미했다. 유닛 개념을 도입했던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의 구분은 3집 이후로 거의 활용되지 않았을 뿐더러 <학원별곡>’부터 <Com’ back>에 이르는 2년 반 동안 멤버들의 스타일링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양사가 가진 ‘A&R을 통한 콘텐츠화’에 대한 시각이 확연히 달랐던 셈이다.
프로모션 측면에도 차이가 있었다. H.O.T.는 ‘앨범 선 발매 후 첫 무대’ 전략을 통해 팬들의 기대감을 최대치로 끌어모았다. 아직 아무것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앨범을 릴리즈 해 충성도 높은 팬덤의 화력을 한데 모았고, 이후 파격적인 첫 무대를 통해 그 관심을 고스란히 화제성으로 연결시켰다. 젝스키스는 앨범 발매 확정도 전에 활동을 시작하고, 이마저도 중간에 타이틀 곡이 바뀌는 등 우왕좌왕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이처럼 양쪽 다 시대적 흐름을 등에 업었지만, SM은 전문적인 분업을 기반으로 디테일한 그림을 그려나갔다면, DSP는 순간적인 감에 의존한 일필휘지의 운영을 고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호연, DSP의 모든 것
이러한 임기응변식 운영에도 불구하고, 아이돌 명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호연 대표의 뛰어난 감각 덕분일 것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보이그룹이라고 일컬어지는 소방차를 비롯, 잼이나 아이돌 등을 제작하며 일찌감치 10대 시장을 가능성을 예견한 걸출한 기획자였다. 제작을 총괄함과 동시에 선곡 및 스타일링 전반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등 전형적인 1인 중심의 매니지먼트를 고수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DSP가 K-pop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미래의 몰락을 예견한 악수이기도 했다.
잠시 침체기에 있던 아이돌 신이 재점화되고, 여전히 번뜩이는 기지로 SS501와 카라를 히트시켜 명맥을 이어가던 2010년, 갑작스러운 병마가 이호연 대표를 덮쳤다. 뇌출혈로 인한 투병의 시작, 그야말로 암운이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직원들 다수가 회사를 떠났고, 당시 전문 경영인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의 아내가 전면에 나서며 큰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이 당시 일어난 카라의 전속계약 해지 통보는 그의 역할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오랜 기간 공들여 쌓아올린 그 기반이 무너지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이호연 대표가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레인보우는 그가 쓰러진 2010년 이후 <A>와 <mach> 이후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며 해체 수순을 밟았고, 에이프릴은 멤버 간 갈등이 계기가 되어 활동을 접고 말았다. 현시점에선 해외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카드와 < 프로듀스 X 101 > 참가로 이름을 알린 손동표 소속의 미래소년이 주축이지만,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분야별 전문화 기반의 시스템을 갖춘 K-pop 신은, 어느덧 특출난 이의 감에만 의존해 생존하기엔 어려운 곳이 되어있었다. 후진 양성이나 프로세스 구축에 다소 소홀했던 것이 결국 시대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 셈이다. 더 이상 K-pop은 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지 않기에.
DSP가 남긴 것
그럼에도 DSP가 남긴 것은 적지 않다. 현재 KPOP 신의 초석을 닦았음은 물론이고, 잠시 아이돌 신이 주춤하던 시절 카라의 일본 진출을 성공 반열에 올리며 한류의 불씨를 되살렸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성과는 결국 ‘음악’이라는 콘텐츠의 본질에 충실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 아니었나 싶다. ‘히트 메이커’에 의존하지 않는 타이틀 곡 기용, 이종필, 전준규, 마경식, 신인수, 김승현, 마리오 볼든 등 내부 작/편곡진이 가세한 수록곡의 완성도는 젝스키스와 핑클의 음악적 성취를 뒷받침했다.
카라 역시 스윗튠의 과감한 기용으로 히트의 단초를 마련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도 2000년대 초 당시 ‘믿고 듣는’ 쪽은 SM보다는 DSP였다. 물론 취향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조금은 생소할 법한 트렌디함으로 무장했던 SM에 비하면 ‘보편적인 유행가’로서의 힘은 DSP가 우위를 점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이야기하고 싶다. 기획력에 무게가 실리는 지금에도, 결코 ‘노래’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명제가 이들의 선사례를 통해 더욱 설득력을 얻는지도 모르겠다.
2018년, 8년간의 투병생활을 끝으로 이호연 대표는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했던 많은 소속 가수들은 생전의 업적과 일에 대한 열정을 칭송하며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렇게 네 번의 해가 바뀌고, DSP는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수순에 이르렀다. 급변하는 엔터계이기에 이러한 흥망성쇠는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곳에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퇴장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 그 허전한 마음이 과거의 추억과 비례해 괜스레 더 크게 느껴진다.
조금은 투박한 방법론이었지만, 그 고집을 통해 작지 않은 성공을 거머쥐었다. 한때 정상에 근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K-pop 사의 한 챕터를 담당하기에 충분한 이력이다. RBW는 향후 DSP의 음원 IP를 신사업에 적극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즉, 회사의 명운은 다했지만 그 유산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때 아이돌 신을 주름 잡으며 시대를 풍미했던 DSP 미디어,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서 그 빛을 발하기를. 오랜 팬으로서 마음속 깊이 바라본다.
황선업 / Hwang Sunup 대중음악평론가 (Pop music critic)
< 당신이 알아야 할 일본 가수들 > 집필, 황선업의 브런치(brunch) 운영.
<사진 제공 - DSP엔터테인먼트>
DSP Media and its valuable footprint
It was reported in January that RBW, well known as Mamamoo’s agency, was planning to acquire DSP Media. Various complex thoughts crossed my mind this time, which was unlike in the past when there had been reports of M&A between other entertainment companies. This M&A, I felt, would represent DSP's “extinction,” as 100% of its stocks would be acquired. This is unlike the incorporation of labels such as HYBE and Kakao. Above all, DSP was an agency that represented first-generation idols that existed throughout my teenage years. Now that April has been disbanded and all existing executives have quit at the same time following the signing of the stock sale contract, DSP Media is barely maintaining its signboard, leaving its splendid glory behind.
As someone who has followed and enthusiastically supported Sechs Kies and Fin.K.L.'s debut in real time during DSP’s Daesung Enterprise days, I have simultaneously hated and loved the agency. If you were a fan of your artist regardless of the time, I think you would feel similarly. It is clear that DSP brought the teen market into the mainstream but it has made many missteps in terms of promoting and caring for its artists. Many people used to recognize SM and DSP as rivals in the early 2000s, but I personally remember always envying H.O.T.’s breakthrough from the perspective of a Sechs Kies fan.
The difference eventually led the two agencies on to opposite paths. Fans were disappointed with the management, which missed the mark even though they had an eye for good talent. Other budding stars who appeared in a flurry basked in the limelight. In other words, the K-pop market had grown too large to expect the public to stay loyal. DSP Media, which has been unable to keep up with the rapidly changing trend, has been on the decline. Despite having contributed to the emergence of the K-pop idol scene, why did DSP have no choice but to leave disgraced? Nevertheless, what legacy did it leave in the idol scene?
H.O.T. and Sechs Kies, how did they differ?
In hindsight, one could have easily guessed SM and DSP’s future to some extent by comparing the two groups. What made H.O.T. seem great from the perspective of a Sechs Kies fan at the time was that each album had a definite concept. The unconventional combination of music and visuals that support a clear theme met the needs of teenagers. This combination soon emerged as a sensational cultural trend, sparking a buzz. However, Sechs Kies did not follow a clear direction. They barely made any changes to the group’s visuals throughout their activities. The distinction between black and white Kies, which adopted the concept of “units,” has rarely been used since the third album. The styling of the members remained similar for two and a half years from “Hakwon Byulgok” to “Com' back.” In other words, the two companies had distinctly different views on “contentization through A&R.”
There was also a difference in terms of promotion. H.O.T. raised fans’ expectations to the maximum through its strategy of “staging its first performance after pre-releasing the album.” In other words, H.O.T. released its album without any prior promotion. By doing so, it brought together the power of its loyal fandom. Later, they would stage an unprecedented performance; public attention for the album fueled H.O.T’s rise to stardom. Meanwhile, Sechs Kies would start its activities even before confirming its album. Sometimes, the title of the album would change, setting an impression that the group lacked consistency. While both groups were affected by the trends of the era, SM had a detailed blueprint based on professional division of labor, while DSP’s course of action was made at the heat of the moment.
Lee Ho-yeon was DSP’s everything
Despite such improvisational management, DSP was successful largely due to CEO Lee Ho-yeon’s excellent business sense. He was an outstanding planner who predicted the potential of the teen market early on by producing Sobangcha (Korea’s first boy group), ZAM, and other idols. He also adhered to one-person management; he oversaw production and exerted influence on overall selection and styling. This was also a decisive factor that allowed DSP to become one of the pillars of K-pop, but at the same time, it was a misstep that hinted at its collapse.
In 2010, when the idol scene, which had been in a slump for a while, was reignited and SS501 and Kara were brought to stardom, Lee Ho-yeon fell sick. His fight against cerebral hemorrhage was a dark moment. In the process, many of the existing employees left the company, and his wife, who was far from a professional manager at the time, came to the forefront, causing great confusion. Kara’s notice of termination of its exclusive contract at the time is a representative event that shows how absolute his role was. His foundation, which took years to build, collapsed in a moment.
Rainbow, which Lee Ho-yeon put a lot of effort into, has not been able to regain its popularity since “A” and “mach” following his collapse in 2010. April ceased its activities due to conflict between its members. At present, DSP’s focus is on KARD, whose activities are based overseas, and MIRAE, consisting of Son Dong-pyo, who became known through his participation in Produce X 101. Nonetheless, DSP is far from its glory of the past. The K-pop scene, equipped with a specialization-based system for each field, has become a red ocean. It has become difficult to survive by relying solely on genius instincts. In other words, negligence in training future talent or building processes resulted in DSP’s obsolescence. K-pop is no longer a market dominated by a single individual.
What has DSP left behind?
Nevertheless, DSP has left a great legacy behind. Not only did it pave the way for the current K-pop scene, but it also revived the Korean Wave through Kara’s successful debut in Japan. In hindsight, these achievements were possible because DSP was faithful to the essence of the content of “music.” DSP was able to produce quality songs for Sechs Kies and Fin.K.L., as it did not rely on “hit makers” for its title songs; songs written and arranged by its internal cohort, including Lee Jong-pil, Jeon Joon-kyu, Ma Kyung-sik, Shin In-soo, Kim Seung-hyun, and Mario Bolden, were the pillars behind the groups’ success.
It is worth noting that Kara also set the stage for “hits” with DSP’s bold attempt at hiring Sweetune. Personally, I think that people in the early 2000s would have preferred DSP’s music to SM’s, as it was something to “listen to without a doubt.” Of course, personal taste would also have played a role but I think that DSP’s songs overpowered those of SM, which followed a “somewhat unfamiliar trend.” DSP’s music, in contrast, followed a “universal trend.” Even now, when there is a lot of weight given to planning, the proposition that the importance of “song” can never be overlooked may be more convincing through this precedent.
In 2018, Lee Ho-yeon passed away after battling the disease for eight years. Many singers from his agency expressed their condolences, praising his work and passion during his lifetime. Four years have passed, and DSP has virtually disappeared into history. Its rise and fall may be unsurprising given how the scene is under consistent, rapid change, but it is regrettable how DSP, which dominated an era, left with disgrace. The sense of emptiness feels amplified when reminiscing DSP’s past glory.
Even though DSP followed a clunky methodology, it achieved great success through its persistence. The fact that it was once close to the top is enough for it to hold on to a chapter in K-pop. RBW announced its plan to actively utilize DSP’s music IP for new businesses in the future. In other words, while the company is now gone, its legacy remains important. DSP Media, which once dominated the idol scene and the era, may maintain its glory through content that many people can enjoy in the future. As a long-time fan, I look at this issue with a heavy 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