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우리 대중음악이 윤상이라는 인물을 접한지도 꽤 오래 되었다. 80년대 후반 손무현과 함께 김완선의 백밴드로 대중에게 처음 얼굴을 비친 이후로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이다. 작곡 참 잘하는 미성의 청년은 이제 50대가 되었고 아직도 KPOP을 상징하는 서정시인이자 선두에 서있는 존경받는 크리에이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틀어보았을 때, 이게 모두 한 사람의 작업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지독한 호기심과 실천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특히 사운드와 관련하여 엔지니어적인 노력도 돋보이는데, 한 라디오에서 유희열만이 자신의 그러한 노력과 시도를 알아보자 매우 기뻐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작곡과 엔지니어링에 능통한 크리에이터는 도통 찾기 어렵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후배들도 여전히 그에게 곡작업을 의뢰하고 있으며, 최근 발매된 데이브레이크 싱글 ‘말이 안 되잖아’ (feat. 헤이즈)도 그의 감성이 짙게 느껴지는 곡이다. 그런데 이 앨범 소개에 “2019년 8월, 윤상 선배님이 건넨 데모곡으로 시작된 이야기”라고 쓰여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오래전부터 데이브레이크의 팬이기도 했고, 함께 작업하고 싶은 욕심은 늘 있었습니다. 2019 년 여름 그들의 콘서트를 다녀온 후, 급격히 팬심이 올라와 지금이 같이 작업을 할 최적의 타이밍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 얼마 후 작사가 김이나 씨의 작업실에서 원석 씨와 함께 만날 기회가 생겨 그날 갖고 있던 데모를 들려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그래서 그 프로젝트 자체가 김이나 씨의 큰 그림 없이는 진행이 어려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로의 작업에 관한 애정도가 워낙 높은 관계여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따뜻한 분위기로 (헤이즈 역시 그 분위기에 잘 적응해 주었고) 잘 마무리한 노래였습니다.”
가수 데뷔 (1990.11. 31) 31년째, 작곡가 데뷔 ( 김현식 정규 4집 여름밤의 꿈 1988.09.30 ) 33년째를 맞이한 이 존경받는 뮤지션의 음악은 간단한 몇 줄의 이력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의 음악적 여정을 돌이켜보았을 때 뮤지션을 뛰어넘어 흡사 연구자 와도 같은 자세를 느낄 수 있으며, 그야말로 음악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시도하면서도 실패가 없는 완전체를 보는 듯하다. 그러니 대다수의 후배들도 거의 1순위로 그를 존경하는 뮤지션으로 꼽을 수 밖에. 그러나 정점에 오른 그에게 만족이란 없다.
“쑥스럽지만 .. 제가 데뷔 때 했던 어느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음악을 하는 게 목표”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웃음). 점점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또 (자신을 존경하는 후배들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분들께는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중음악 씬에서 여러가지 역할을 오래 하다 보니 그런 평가를 해주는 후배들이 생겨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발라드 가수, 누군가에게는 한국 전자음악의 선구자로 각인되어 있다. 특히나 한국음악계에서 아무런 가이드가 없었던 전자음악을 대중들이 쉬이 수용할 수 있게 표현한 그의 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전자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또 그의 최초의 장비인 카시오 CZ-5000를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과 현재 존재여부도 궁금해졌다.
“80년대 초반 국내 뮤지션들에게도 생소했던 전자악기들을 이미 사용하던 몇몇 분 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신디사이저의 존재를 처음 TV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 후 오랫동안 그걸 손에 넣어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비는 당시 제 작업실이 협소하기도 했고, 새로운 악기들이 쏟아지듯 나올 때라 2년 정도 후 다른 악기와 교환했습니다. 사실 정말 원했던 악기는 너무 고가여서 차선으로 결정한 중고 악기였지만, 저에게 첫 신디사이저였기에 그 기분은 아직도 생생한 것 같아요. 기능이나 소리를 파악하기 위해서 며칠 동안 잠도 안 자고 씨름을 했습니다.”
그는 본래 작곡가로서 김현식, 황치훈, 변진섭, 김민우, 강수지 등 많은 가수들의 히트곡을 만들며 출발했다. 그러나 김민우 앨범 녹음 중 김민우에게 곡 표현을 가이드보컬 방식으로 불러주게 되었는데, 당시 EOS 사운드 프로덕션 김광수 대표가 그것을 듣게 되며 그에게 당시 3000만원의 거금을 제안하며 데뷔를 권한다. 이에 윤상은 가수 데뷔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평소 가지고 싶었던 장비를 구입하고도 남을 금액이라 마침내 1990년 ¡°이별의 그늘¡±로 데뷔하게 된다. 당시 그는 그 계약금으로 스튜디오를 꾸몄는데 스스로 ‘천국’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스튜디오에서의 작업과 일과는 어땠을까? 그리고 그 ‘천국’에서 1집 음반을 거의 시퀀싱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 대한 설명도 듣고싶어졌다.
“방음이라든지 여러 이유로 작업실은 회사에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거의 거의 거기서 숙식을 하면서 1집 앨범을 6개월 정도 작업한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악기들이 늘어나서 실제 작업한 시간보다 사전을 펴놓고 악기들의 매뉴얼을 본 시간이 더 많지 않았나 싶은데 결국 마지막 곡 까지 작업하고, 녹음부스 문제로 작업실을 다시 지하로 옮긴 기억이 나네요.
(1집은) 우선 작업실에서 시퀀서로 각각의 신스나 모듈을 이용해 편곡을 완성하면 사용한 모든 악기를 녹음실로 가져가서 그대로 셋팅하고, 녹음실 멀티트랙 레코더에 싱크를 맞춰서 녹음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번거롭고 힘든 과정이었죠. 악기들의 무게도 상당했고 개수도 많아 승용차 한 대로 옮기기가 어려웠어요. 그렇게 녹음실 멀티에 트랙을 녹음 후 노래하고 믹스하면 완성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데뷔앨범은 약 90만 장 이상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는 곧장 2집 앨범에 대한 소속사의 기대로 이어졌으며, 애초에 가수에 뜻이 없었던 그에게 개인적인 부담감이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부담 속에서 창작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데뷔앨범 이후 기획사뿐 아니라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그는 2집 앨범을 파트 1, 파트 2로 나누어 시간차로 발매했다. 그렇다면 한 앨범 두 가지 스타일의 앨범 작업은 인기 대중가수와 천재 뮤지션 사이의 고뇌 속 의도에 기인한 전략이었을까?
“전략이라기보다 계약서에 그에 관한 특별한 조항이 없어서 저는 2집부터 마음대로 하고 싶었고, 회사는 1집처럼 모든 곡을 저의 노래로 녹음하기를 원했기에 갈등이 지속되던 상황에 회사와 제가 합의한 결과로 기억합니다.
솔로 가수로의 성공이 오히려 부담이 된 건 확실하지만. 오랫동안 대중음악을 할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에 소속사와 앞으로의 방향 문제로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 “파일럿” OST 앨범 프로듀싱 후 독립해서 작은 독립기획사를 만들었습니다. 가수 데뷔 후에도 다른 가수들의 앨범 프로듀싱을 계속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네요.”
그는 일련의 데모 작업 외에도 밴드음악을 지속적으로 해온 뮤지션이기도 하다. 고교시절 짧게 결성했었으며 윤상 2집 파트 2로 부활했었던 뉴웨이브 밴드 ‘페이퍼 모드’, 그리고 손무현과 함께한 김완선 백밴드 ‘실루엣’까지 그의 밴드음악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밴드 음악의 베이시스트에서 출발하여 전혀 밴드와 상반된 용어도 생소한 ‘시퀀싱’ 뮤직의 선두주자로 여러 명과 함께하는 뮤지션에서 혼자 거의 모든 작업을 프로듀싱하는 뮤지션으로 전환헸을 때, 각 음악 포지션에서 그는 어떤 다른 매력들을 느꼈을까? 또 전자 사운드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특유의 감성 보컬과 서정적 멜로디가 공존하는 음악들로 신선함을 넘어 다양성을 제시하고 있는데(프로젝트인 ‘노댄스’ , ‘모텟’ 제외), 스스로의 음악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경계를 매우 절묘하게 유지하시는 방법도 궁금해졌다.
“(밴드는) 팝음악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포맷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주하는 악단의 장점도 있지만 결국 편곡자와 지휘자가 상상한 결과이고. 3~5명의 멤버들이 각각의 개성을 녹여내면서 음악을 완성하는 형태가 한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결과를 만든 여러 증거들이 있으니까요.
밴드 음악의 장점을 이야기한 후라서 조금 어색한 기분입니다만, 결국 제가 밴드 활동을 하며 각 파트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시퀀싱 도전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가능하게 해준 테크놀로지가 태동하던 시대에 음악을 시작한 이유도 있지요.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면 행복감도 크지만. 그런 매력을 떠나 혼자 하는 음악은 상당히 에너지가 소모되는 작업입니다.
(음악적 균형에 대해서는) 특별히 어떤 방법을 고민한 적은 없습니다. 제 정서는 Pop 음악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실험적이거나 대중적 취향을 조금 벗어난 시도를 할 때도 어느 정도 스스로 리밋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미디 음악, 시퀀싱 음악에서 윤상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故 신해철과 함께한 프로젝트 ‘노댄스’(1996.10)는 그의 전자 음악이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지 보여준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들은 질주, 달리기 등이 수록 테크노 기반의 실험적인 곡들로 평단과 마니아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 두 거물 뮤지션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였다.
“뮤지션으로서 해철 씨는 저보다 음악적 경계가 없는 친구였습니다. 하드한 락이나 헤비메탈, 실험적인 일렉트로닉, 때로는 감성 충만한 발라드까지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대단했고, 머리로 생각한 걸 실행하는 속도나 에너지도 비교할 사람이 없을 만큼 대단한 아티스트죠.”
그는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흩어진 나날들을 프로듀싱하며 강수지를 최고의 아이돌로 성공시키면서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프로듀서’ 란 명칭으로 불린 흔치 않은 세대이다. 그가 느끼는 요즘 케이팝 및 대한민국 대중음악 ’프로듀서’ 와 당시 ‘프로듀서’의 프로듀싱 방법이나 기법들의 차이도 궁금해졌다.
“본질적으로 아티스트의 가장 멋진 연주와 노래를 이끌어내는 역할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와 분명히 다른 한 가지는 실행취소(Undo)버튼의 탄생인데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테이프으로 녹음을 했기 때문에, 여러 이유로 좋았던 순간을 놓쳐버리는 일 이 많았죠 하지만 실행취소의 탄생으로 엔지니어들과 녹음 때 전쟁 같은 긴장감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군 제대 후 발매한 비정규 앨범 ‘레나시미엔토’ (1996.05)에서 정규 2집 파트 2보다 더 깊어지고 세련된 사운드로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가수들을 섭외하여 기존 곡들을 그 나라 언어로 번언하여 마치 제3세계 음악을 듣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본인의 색을 대중적으로 녹여내기 시작, 특유의 밀도 있는 사운드 서정적인 멜로디의 감성으로 가장 윤상 다운 앨범으로 평가받는 ‘insensible’을 1998년 5월 발표했으며, 2000년 정규 3집 클리셰 (cliche)까지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악 활동도 이어갔다.
이후 mbc 라디오 윤상의 음악살롱 DJ로 활동하며 제이, 박효신, 박화요비의 작/편곡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당시 윤상의 음악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받았던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게 되며, 이 시점부터 윤상의 곡을 아이돌 가수들의 앨범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보아의 3집 앨범 ‘the show must go on’ 은 수록된 다른 곡들과 다른 독특한 신스 사운드 메이킹과 유니크한 리듬 트랙이 매력적인 곡으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팬들의 우려와 달리 그만의 색깔과 월드뮤직 성향이 돋보이는 4집 ‘이사’(2002)를 발매하게 된다.
“(SM계약의 경우) IMF 즈음으로 기억됩니다만, 제 음반을 계약했던 회사가 갑자기 음악사업을 중단한다는 이유로 계약금 반환 요청을 해왔습니다. 때문에 몇몇 회사와 이야기가 오갔고, 그중 제 상황을 가장 이해해 준 분이 이수만 대표님 이였습니다. SM은 제 음반 유통만 담당하면서 음악적인 부분은 전적으로 저에게 맡겨주었기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돌 음악과 발라드 음악의 작법차이는) 리듬 트랙부터 발라드와는 다른 개념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정서적으로는 제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을 수 없겠지만 편곡 작업에서 그 시대를 크게 관통하는 스타일을 캣치해서 저의 색깔로 조금씩 변형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월드뮤직에 대해서) 소위 월드뮤직이라 불리던 남미/유럽의 음악은 중고교 시절부터 국내 FM 라디오를 통해 접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영미 팝 음악과는 사뭇 다른 정서를 동경해 왔습니다. 제가 군 복무 시절 박창학 씨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보다 많은 다양한 나라의 음악들을 저에게 소개해 주었고, 전역 후 만드는 첫 앨범은 내 노래를 유럽 출신 가수들을 초대해서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자연스럽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4집을 구상할 때도 이전까지 저의 작업들이 너무 전자악기의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소위 월드뮤직의 매력에 깊이 빠져있었기도 해서 모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일본에서 공부 중이던 박창학 씨의 지인이 브라질 음악을 하는 일본 밴드 “발란사”의 멤버란 사실도 알게 되면서... 여러 상황이 자연스럽게 어쿠스틱 음악에 대한 저의 니즈를 해결할 수 있는 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정규 5집도 발표하고 당시 인기 있었던 가수들과 작업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2003년, 그는 돌연 유학을 떠난다. 버클리 뮤직 뮤직 신서 신스, NYU 뮤직 테크널러지 학사, 석사 과정의 긴 유학생활 이었다. 그리고 2010년, 마침내 긴 유학 생활을 정리 후 귀국하여 대학교에 교수로 취임하여 후진 양성과 후배 가수들의 작곡가, 라디오 디제이(윤상의 팝스팝스), 오디션 프로그램 멘토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2002년 아내와 결혼하면서 지금이 아니면 유학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생각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음악을 독학하면서 버클리로의 유학은 언젠가 꼭 이루어야 할 목표처럼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동료 뮤지션들도 적지 않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모두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죠. 김동률 씨가 먼저 유학을 시작하면서 보내준 소식들을 통해 마음을 굳히게 되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아이돌 작업에 대해 좋게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학을 시작하고 3~4년 동안 아주 몇 곡 외의 작업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쌓였던 에너지? 를 그 작업들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웃음). 송북은 말씀하신 대로 박창학 씨의 프로듀싱으로 완성된 앨범이어서 저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참여해 준 동료 뮤지션들이 보내준 응원에 감사한 마음을 바탕으로 좀 더 분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귀국에 대해)솔직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웃음)
NYU를 마칠 즈음 먼저 졸업한 선배 프로듀서가 마침 DJ를 제안해 주었고, 비슷한 타이밍에 초빙교수를 제안 받았는데 졸업 후 거취 문제를 고민하던 상황이라 망설임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저 먼저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 그는 곧장 2010년 10월 가인의 ‘돌이킬 수 없는’, 2011년 2월 아이유의 ‘나만 몰랐던 이야기’, 2014년 1월 레인보우 블랙 ‘cha cha’를 작곡하다 본격적으로 다 빈크 (davink), 스페이스카우보이 (space cowboy)와 함께 원피스 (1piece)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아이돌 음악을 프로듀싱하게 된다. 2014년 11월 데뷔한 걸그룹 ‘러블리즈’ 총괄 프로듀싱을 맡으며 이른바 ‘러블리즈’의 아버지로 불리우기도 했다.
“돌아보면 모든 상황이 저 혼자만의 결단이나 욕심으로 만들어진 건 없는 듯합니다.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이스카우보이 (spacecowboy)와 다빈크 (Davink) 를 만나 마치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관계가 만들어졌고, 원피스 (1piece) 를 결성한 이유는 ‘러블리즈’라는 신인 팀의 프로듀싱 제의를 받고 혼자서 엄두가 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두 친구들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BTS를 비롯하여 수많은 케이팝 아이돌의 인기가 끝을 모르게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케이팝이 선두에 서서 대한민국의 음악 콘텐츠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음악 생활을 30년 이상 이어오면서 발라드부터 전자음악, 케이팝까지 이 모든 흐름을 경험하고 지켜본 산증인이다.
그런 그가 그리는 대한민국 음악 콘텐츠의 미래와 그것을 발전시켜줄 후배 뮤지션 및 관계자들에게 하고픈 말을 옮겨보았다.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땐 상상할 수 없었던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매력적이고 재능 있는 뮤지션들을 만나왔지만 그들 모두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음악적 가치나 비전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진행된 부분도 많아서 앞으로 우리 음악 콘텐츠가 어떠해야 한다는 이야기 보다, 지금까지 성장해온 K-pop을 보다 견고하게 그 매력을 잃지 않도록 내실을 쌓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최선을 다한다고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역시 꿈은 상상한 만큼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음악 안에서 꿈을 꾸는 분들 모두 상상했던 현실을 마주할 수 있길 응원합니다.
Legendary Musician, yoonsang
Come to think of it, it has been quite a while since our popular music came to encounter this person, yoonsang. It has already been over 30 years since he first showed his face to the public as Wansun Kim’s backup band with Moohyun Son in the late 1980s. The young man with a sweet voice and a great talent for composing is now in his 50s, and he still holds his place as a sentimental poet who symbolizes K-pop and a leading and respected creator. When we look at the entirety of his past and his present, the wide spectrum of his work almost makes us doubt it has all come from a single person. And this is founded by his incredible curiosity about music and his ability to put that into practice. In particular, his engineer-like effort regarding sound stands out. On the radio, there was a story about how he strongly rejoiced when Heeyeol You was the only one to recognize his effort and attempts. Is it not very difficult to find a creator who is competent at both composing and engineering?
And so, the younger generation of musicians are still requesting songs from him, and “Doesn’t Make Sense” (feat. Heize), the recently-released single by Daybreak, is strongly evocative of his sentiments. In the introduction to this album, it says “a story that started with a demo yoonsang has given us in August, 2019”. This makes us wonder what had happened back then.
“As a longtime fan of Daybreak, I always did have the desire to work with them. After going to their concert in the summer of 2019, my love for them as a fan arose drastically and I thought it may be the perfect time for us to work together. Soon after that, I had the opportunity to meet Wonseok at lyricist Eana Kim’s studio, so it began as I played him the demo I had on that day. I believe it would have been difficult to proceed with the project itself without Eana Kim’s big picture. As there was such a huge love for each other’s work in our relationship, we were able to finish the song with a heart-warming atmosphere I had not experienced before (and Heize had adapted well to that atmosphere, too).”
31 years since his debut as a singer (1990.11.31) and 33 years since his debut as a composer (Hyunsik Kim’s 4th album <Dream of Summer Night>, 1988.09.30), this musician’s work cannot be expressed simply into a few lines in the resume. When we look back on his musical journey, we can sense his researcher-like attitude that surpasses that of a musician, and it feels like we are looking at a completed set that has tried everything that can be done musically without experiencing failure. It is no wonder that a huge number of younger artists name him as the musician they respect the most.
“I feel shy, but… I remember saying that “doing music for a long time was my goal” at an interview I gave when I had just made my debut (laughs). I feel that I am getting closer to that goal. Also, (to the younger artists who respect him) I would like to take this opportunity to give my sincere thanks to those who have said that. I feel that there are such young artists who evaluate me as such, as I have been playing various roles in the popular music industry for a long time.”
To some, he is a ballad singer, and to others, he is remembered as the leader of Korea’s electronic music. In particular, his contribution in allowing the public to easily accept electronic music at a time when there was no guide whatsoever in the Korean music industry cannot be put into words. Then, how did he come to encounter electronic music? We would also like to hear about the joy he felt when he first obtained CASIO CZ-5000, his first device, and whether he still has it or not.
“Even among local musicians in the early 1980s, there were a few who were already making use of electronic instruments. I first learned about the existence of synthesizers through television in my later years of elementary school, and since then, I had dreamt for a long time that I could obtain that and do music with it. As for the device, my studio back then was quite small, and it was a time when new musical instruments were coming out quickly, so I had exchanged it with another instrument around 2 years after that. Actually, it was a secondhand instrument I got as my second choice, as the instrument I really wanted was too pricey, but it was my first synthesizer so I still remember how I felt very vividly. I wrestled with it for a few days without even sleeping to figure out its functions and its sounds.”
Originally, he had started off as a composer, making hit songs for many singers including Hyunsik Kim, Chihoon Hwang, Minwoo Kim, Susie Kang, etc. However, while recording Minwoo Kim’s album, he had come to sing the guide vocals to Minwoo Kim to show him how to express the song, and when the then-CEO Kwangsoo Kim of EOS Sound Production heard it, he suggested that yoonsang makes his debut while offering a huge sum of ₩30 million. While yoonsang was not too keen on making a debut, because of the sum of money that could easily cover the price of the devices he had been wanting to buy, he finally came to make his debut with ¡°Shades of Parting¡± in 1990. Back then, he had decorated his studio with the down payment, and it was enough for him to call it “heaven”. Then, what was his work and his daily schedule like at the studio? Also, he mentioned that he created most of his first album through sequencing in “heaven”. We would like to hear more about that process.
“Due to various reasons, such as soundproofing, it was inevitable that the studio was made within the company building. I think I worked on the first album for about 6 months while mainly eating and sleeping in that place. I feel like I spent more time reading the manuals for the instruments with a dictionary than actually working on composing, as I had more musical instruments, but after I finished working on the last song, I remember moving the studio to the basement due to some issues with the recording booth.
(For the first album), I first had to finish arranging the songs using the synth or the module for each one with the sequencer, take all the instruments I had used to the recording studio and set them up exactly as they were, and then record in sync with the multi-track recorder at the recording studio. It was a bothersome and difficult process that you cannot imagine using today. The instruments were quite heavy and there were many of them, so it was difficult to move them all in a single passenger car. It was a time when you had to record the track on the multi recorder at the studio, sing the vocals and then mix it to complete the song.”
That debut album of his was a hit, with a record of over 900 thousand copies sold. This instantly led his company to have high expectations for his second album, and it served to increase his personal sense of pressure, as someone who never had an intention to become a singer. It would not have been easy to continue his creative work amidst this pressure. Even still, as he could not let the expectations of his company and the public down, he released his second album in two parts, with some time in between them. And, despite his many worries, Part 1 was a mega-hit album with over 1 million copies sold. But yoonsang, who had a clear perspective on the music he wanted to do, used guest vocals and made more experimental attempts with the sound on Part 2, and his second album had a sales record of 300 thousand copies. Then was this one-album-two-styles work a strategy originating from an intention within the debate between a popular music artist and a genius musician?
It was not exactly a strategy. As there was no specific article about that on the contract, I wished to start doing whatever I wanted to do on the second album, but the company wanted me to record every track with my vocals, so I remember it as the result of a compromise the company and I made amidst the conflict.
“It is certain that my success as a solo singer became a pressure instead. But my desire to continue doing popular music for a long time had not changed one bit, so I think there were many conflicts between my company and I regarding the direction I would be taking from then on. After producing an OST album for the drama series “Pilot”, I became independent and founded a small independent production company. Even after my debut as a singer, I continued producing albums for other singers, and you could say it is still ongoing to this day.”
Apart from a series of demos, he is also a musician who has been making band music consistently. From the new wave band “Paper Mode”, which was active for a short time in yoonsang’s high school days and was revived for Part 2 of his second album, to “Silhouette”, the backup band for Wansun Kim that he did together with Moohyun Son, we can witness his love for band music. When he started out as a bassist for band music, became a leading musician working together with many other artists for “sequencing” music that contrasts hugely from band music and whose term itself sounds unfamiliar, and even transformed into a musician who produces almost all the work on his own, which different charms did he find in each of those musical positions?
Also, he is offering a variety that transcends newness with his songs, which are based on electronic sounds but demonstrate his unique emotive vocals and his sentimental melodies at the same time (apart from “Nodance” and “mo:tet”, which were special projects). We would like to hear about how he manages to maintain the boundary of his music so cleverly without leaning on any one side.
“I believe that a band is a format that has taken the renaissance aspect of pop music. There is the benefit of a musical ensemble where more people play the instruments, but, at the end of the day, it is the result of the imagination of the person who arranged the song, or of the conductor. There is a lot of evidence where the form of music that 3 to 5 members complete by bringing out each of their qualities has created a result that would have been challenging to express with a single person’s imagination.”
“This feels a little awkward to say after stating the benefit of band music, but I believe that I was able to challenge myself to do sequencing as I had some understanding of the role of each part through participating in a band. And, above all, there is the fact that I started doing music at a time when the technology that enabled that was being born. While the joy of creating a result you like is significant, doing music on your own is a task that consumed a great amount of energy, despite the beauty of it.”
“(As for the musical balance), I have not necessarily thought hard about a particular method. As my style originated from pop music, I feel a certain level of limitation for myself even when I am trying out something that strays from what is mainstream.”
On the other hand, “Nodance” (1996.10) where he collaborated with the late Haechul Shin, whose name often comes up in a discussion on midi and sequencing music along with yoonsang’s, was a project that demonstrated how far his electronic music can go. Through this project, they received a lot of love from critics and manias with their techno-based experimental tracks including “Running”, “Gallop”, etc. Above all, the collaboration between the two big-shot musicians itself was the talk of the town.
“As a musician, Haechul was someone with less musical borders than I. His ability to express hardcore rock and heavy metal, experimental electronic or even sentimental ballad was brilliant, and he is an incredible artist whose speed and energy in acting upon his ideas was unprecedented.”
Through producing Susie Kang’s “Violet Fragrance” and “Scattered Days”, and launching her into stardom as the best idol star, he is from a rare generation where he was called a “producer”, a title that was quite foreign at the time. We wanted to hear about the differences he perceives in the producing methods and techniques between the “producers” of K-pop and Korean popular music these days, and the “producers” back in time.
“Fundamentally, I feel that there is no difference in it being a role that brings out the best musical performance and singing in the artists. One definite difference from back then is the birth of the “Undo” button. Up until the early 1990s, we used a tape recorder, so we had often missed a lot of great moments due to various reasons. But thanks to the creation of the Undo button, the war-like tension during the recording sessions with the engineers has found peace.”
In his non-full length album “Renacimiento” (1996.05), which he released after he was discharged from the military service, he used deeper and more stylish sounds than in Part 2 of his second full-length album and hired Spanish, French and Italian singers to adapt the existing songs into their languages, creating an impression that we were listening to third world music. He then began to express his own color in a mainstream way again, and had released “Insensible”, an album viewed as the most “yoonsang-like” album with his unique dense sound and his sentimental melodies in May, 1998. He also continued his career as a singer-songwriter with his third full-length album, “Cliché”.
Afterwards, as the DJ of “yoonsang’s Music Salon” on MBC Radio, he also wrote and arranged songs for Jay, Hyoshin Park and Hwayobi Park. He then came to sign a contract with SM Entertainment, which was said to be incongruent with yoonsang’s music style back then, and this is when we started to find yoonsang’s songs in idol stars’ albums. In particular, “The Show Must Go On” on Boa’s third album is a song with unique synth sound-making and rhythm track that is distinguished from the other songs, leaving a strong impression.
And, unlike his fans’ worries, he comes to release his fourth album “Migration” (2002), where his unique color and his tendency towards world music stand out.
“(As for signing a contract with SM Entertainment), I think it was around IMF. The company I had signed my contract with had requested that I return the down payment, notifying that they were terminating their music business. Therefore, I had a discussion with a few companies, and CEO Sooman Lee was the person who understood my situation the best. SM merely took charge of the distribution of my albums while leaving the musical aspect entirely up to me, so I am still grateful for them. (The difference between composing idol songs and ballad songs is), I feel it is a task that requires a different notion, right from the rhythm track. I may perhaps be unable to exceed my own limitations, but I believe that I have been transforming them with my own color by catching the style that pervades the given time period during the process of arranging.”
“(Regarding world music), I was able to encounter the so-called “world music”, which is South American/European music, through the local FM radio since I was in middle and high school. Since then, I have admired its sentiments, which are quite different from those of the Anglo-American pop music. Back when I was serving in the military, Changhak Park had introduced me to the music of a wider variety of nations while studying abroad in Japan, and I think I had naturally developed the ambition to create the first album after my discharge by inviting some European singers over. Even when I was planning my fourth album, I felt that my previous work was too dependent on electronic instruments, and I was deeply into the so-called world music, so I wanted to go on an adventure. I had just happened to find out that Changhak Park, who was studying in Japan, was acquainted with a member of the Japanese band “Balansa”, who were doing Brazilian music… The various circumstances smoothly led me to satiate my needs towards acoustic music.”
And so, while proceeding with his work actively by releasing his fifth full-length album, collaborating with the singers who were popular at the time, etc. he suddenly left to study abroad. He studied abroad for a long time, obtaining a bachelor’s degree in Music Synthesis at Berklee College of Music, and a bachelor’s degree and a master’s degree in Music Technology at NYU. And, in 2010, he finally wrapped up his time abroad and came back to Korea to work as a professor at a university to cultivate his musical successors, as well as proceeding with various activities as a composer for a younger generation of singers, the DJ of a radio show (yoonsang’s Pops Pops) and a mentor on an audition program.
“When my wife and I got married in 2002, I had come to leave as I felt that studying abroad would become more difficult in time if I did not take that opportunity then. I think studying at Berklee was engraved in my mind as a goal I had to achieve one day since I first taught myself to do music. As far as I remember, many of my fellow musicians had that idea in mind as well, but it could not have been an easy decision for anyone, realistically speaking. I think I had come to make up my mind through Dongryul Kim, who kept me posted when he began his study abroad before I did (laughs).
And thank you for remembering my work with idol music fondly. For about 3 to 4 years since I started studying abroad, I was not able to create anything aside from a very few songs. I think I was able to use the energy that had been piled up through those work (laugh). As you have mentioned, Songbook was an album that was completed through Changhak Park’s producing, so my role was not very significant… I believe that I was able to work harder based on my gratefulness towards the support my fellow musicians have sent me through their participation.”
“(About coming back to Korea), frankly, I must admit that I am not the type to make solid plans for the future (laughs).When I was about to graduate from NYU, a producer who had graduated before me had offered me the position of a radio DJ, and I was offered a place as a visiting professor around the same time. This was back when I was contemplating what to do after I graduate, so I had come to travel back to Korea first without hesitation.”
As soon as he came back, he composed Gain’s “Irreversible” in October 2010, IU’s “Only I Didn’t Know” in February 2011 and Rainbow Black’s “Cha Cha” in January 2014, then formed “1Piece” with Davink and Spacecowboy to officially begin producing idol music. As the executive producer of “Lovelyz”, a girl group who made their debut in November, 2014, he was also known as the father of “Lovelyz”.
“Looking back, it seems that none of these situations were created through my solitary resolution or ambition. I met Spacecowboy and Davink soon after I came back to Korea, and we developed a comfortable relationship as though we had known each other for a long time. The reason I formed 1Piece was, when I was offered the role of the producer for the new group, “Lovelyz”, I did not feel that I could take the role on my own, so I naturally came to start out with those two friends of mine.”
Today, the popularity of the countless number of K-pop idols including BTS is ascending, and it knows no limits. And K-pop is in the front line, and is playing a significant role in introducing Korea’s music contents. He is a living witness who has experienced and watched the flow, from ballad to electronic music and even K-pop, having continued his musical career for over 30 years. We have delivered what he wants for the future of Korea’s music contents, and a message he wants to give the younger generation of musicians and those working in the industry.
“The time we are living in now was unimaginable at the time I first started doing music. I have met many charming and talented musicians over a period of long time, but not all of them could create a successful result. A lot of the musical values and visions in my mind had proceeded in a direction that had never even crossed my mind. So, rather than talk about how our music contents should be in the future, I feel that we must strive to solidify the foundation of K-pop, which has continued to grow to this day, so that it does not lose its charm. Also, while it is true that not everyone can achieve their dream even if they do their best, I do believe that your dreams come true to a point you have imagined them. I will root for everyone with a dream in music to meet your imaginations as your re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