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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설 윤상

 그러고보니 우리 대중음악이 윤상이라는 인물을 접한지도 꽤 오래 되었다. 80년대 후반 손무현과 함께 김완선의 백밴드로 대중에게 처음 얼굴을 비친 이후로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이다. 작곡 참 잘하는 미성의 청년은 이제 50대가 되었고 아직도 KPOP을 상징하는 서정시인이자 선두에 서있는 존경받는 크리에이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통틀어보았을 때, 이게 모두 한 사람의 작업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지독한 호기심과 실천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특히 사운드와 관련하여 엔지니어적인 노력도 돋보이는데, 한 라디오에서 유희열만이 자신의 그러한 노력과 시도를 알아보자 매우 기뻐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작곡과 엔지니어링에 능통한 크리에이터는 도통 찾기 어렵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후배들도 여전히 그에게 곡작업을 의뢰하고 있으며, 최근 발매된 데이브레이크 싱글 ‘말이 안 되잖아’ (feat. 헤이즈)도 그의 감성이 짙게 느껴지는 곡이다. 그런데 이 앨범 소개에 “2019년 8월, 윤상 선배님이 건넨 데모곡으로 시작된 이야기”라고 쓰여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오래전부터 데이브레이크의 팬이기도 했고, 함께 작업하고 싶은 욕심은 늘 있었습니다. 2019 년 여름 그들의 콘서트를 다녀온 후, 급격히 팬심이 올라와 지금이 같이 작업을 할 최적의 타이밍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 얼마 후 작사가 김이나 씨의 작업실에서 원석 씨와 함께 만날 기회가 생겨 그날 갖고 있던 데모를 들려주면서 시작되었습니다.그래서 그 프로젝트 자체가 김이나 씨의 큰 그림 없이는 진행이 어려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로의 작업에 관한 애정도가 워낙 높은 관계여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따뜻한 분위기로 (헤이즈 역시 그 분위기에 잘 적응해 주었고) 잘 마무리한 노래였습니다.”


가수 데뷔 (1990.11. 31) 31년째, 작곡가 데뷔 ( 김현식 정규 4집 여름밤의 꿈 1988.09.30 ) 33년째를 맞이한 이 존경받는 뮤지션의 음악은 간단한 몇 줄의 이력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그의 음악적 여정을 돌이켜보았을 때 뮤지션을 뛰어넘어 흡사 연구자 와도 같은 자세를 느낄 수 있으며, 그야말로 음악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시도하면서도 실패가 없는 완전체를 보는 듯하다. 그러니 대다수의 후배들도 거의 1순위로 그를 존경하는 뮤지션으로 꼽을 수 밖에. 그러나 정점에 오른 그에게 만족이란 없다. 






“쑥스럽지만 .. 제가 데뷔 때 했던 어느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음악을 하는 게 목표”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웃음). 점점 그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또 (자신을 존경하는 후배들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분들께는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대중음악 씬에서 여러가지 역할을 오래 하다 보니 그런 평가를 해주는 후배들이 생겨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누군가에게는 발라드 가수, 누군가에게는 한국 전자음악의 선구자로 각인되어 있다. 특히나 한국음악계에서 아무런 가이드가 없었던 전자음악을 대중들이 쉬이 수용할 수 있게 표현한 그의 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전자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또 그의 최초의 장비인 카시오 CZ-5000를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과 현재 존재여부도 궁금해졌다.


“80년대 초반 국내 뮤지션들에게도 생소했던 전자악기들을 이미 사용하던 몇몇 분 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 신디사이저의 존재를 처음 TV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 후 오랫동안 그걸 손에 넣어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장비는 당시 제 작업실이 협소하기도 했고, 새로운 악기들이 쏟아지듯 나올 때라 2년 정도 후 다른 악기와 교환했습니다. 사실 정말 원했던 악기는 너무 고가여서 차선으로 결정한 중고 악기였지만, 저에게 첫 신디사이저였기에 그 기분은 아직도 생생한 것 같아요. 기능이나 소리를 파악하기 위해서 며칠 동안 잠도 안 자고 씨름을 했습니다.”  


그는 본래 작곡가로서 김현식, 황치훈, 변진섭, 김민우, 강수지 등 많은 가수들의 히트곡을 만들며 출발했다. 그러나 김민우 앨범 녹음 중 김민우에게 곡 표현을 가이드보컬 방식으로 불러주게 되었는데, 당시 EOS 사운드 프로덕션 김광수 대표가 그것을 듣게 되며 그에게 당시 3000만원의 거금을 제안하며 데뷔를 권한다. 이에 윤상은 가수 데뷔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평소 가지고 싶었던 장비를 구입하고도 남을 금액이라 마침내 1990년 ¡°이별의 그늘¡±로 데뷔하게 된다. 당시 그는 그 계약금으로 스튜디오를 꾸몄는데 스스로 ‘천국’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스튜디오에서의 작업과 일과는 어땠을까? 그리고 그 ‘천국’에서 1집 음반을 거의 시퀀싱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 대한 설명도 듣고싶어졌다.


“방음이라든지 여러 이유로 작업실은 회사에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거의 거의 거기서 숙식을 하면서 1집 앨범을 6개월 정도 작업한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악기들이 늘어나서 실제 작업한 시간보다 사전을 펴놓고 악기들의 매뉴얼을 본 시간이 더 많지 않았나 싶은데 결국 마지막 곡 까지 작업하고, 녹음부스 문제로 작업실을 다시 지하로 옮긴 기억이 나네요.

(1집은) 우선 작업실에서 시퀀서로 각각의 신스나 모듈을 이용해 편곡을 완성하면 사용한 모든 악기를 녹음실로 가져가서 그대로 셋팅하고, 녹음실 멀티트랙 레코더에 싱크를 맞춰서 녹음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번거롭고 힘든 과정이었죠. 악기들의 무게도 상당했고 개수도 많아 승용차 한 대로 옮기기가 어려웠어요. 그렇게 녹음실 멀티에 트랙을 녹음 후 노래하고 믹스하면 완성이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데뷔앨범은 약 90만 장 이상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는 곧장 2집 앨범에 대한 소속사의 기대로 이어졌으며, 애초에 가수에 뜻이 없었던 그에게 개인적인 부담감이 더욱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부담 속에서 창작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데뷔앨범 이후 기획사뿐 아니라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던 그는 2집 앨범을 파트 1, 파트 2로 나누어 시간차로 발매했다. 그렇다면 한 앨범 두 가지 스타일의 앨범 작업은 인기 대중가수와 천재 뮤지션 사이의 고뇌 속 의도에 기인한 전략이었을까?


“전략이라기보다 계약서에 그에 관한 특별한 조항이 없어서 저는 2집부터 마음대로 하고 싶었고, 회사는 1집처럼 모든 곡을 저의 노래로 녹음하기를 원했기에 갈등이 지속되던 상황에 회사와 제가 합의한 결과로 기억합니다.

솔로 가수로의 성공이 오히려 부담이 된 건 확실하지만. 오랫동안 대중음악을 할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에 소속사와 앞으로의 방향 문제로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 “파일럿” OST 앨범 프로듀싱 후 독립해서 작은 독립기획사를 만들었습니다. 가수 데뷔 후에도 다른 가수들의 앨범 프로듀싱을 계속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네요.”






그는 일련의 데모 작업 외에도 밴드음악을 지속적으로 해온 뮤지션이기도 하다. 고교시절 짧게 결성했었으며 윤상 2집 파트 2로 부활했었던 뉴웨이브 밴드 ‘페이퍼 모드’, 그리고 손무현과 함께한 김완선 백밴드 ‘실루엣’까지 그의 밴드음악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밴드 음악의 베이시스트에서 출발하여 전혀 밴드와 상반된 용어도 생소한 ‘시퀀싱’ 뮤직의 선두주자로 여러 명과 함께하는 뮤지션에서 혼자 거의 모든 작업을 프로듀싱하는 뮤지션으로 전환헸을 때, 각 음악 포지션에서 그는 어떤 다른 매력들을 느꼈을까? 또 전자 사운드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특유의 감성 보컬과 서정적 멜로디가 공존하는 음악들로 신선함을 넘어 다양성을 제시하고 있는데(프로젝트인 ‘노댄스’ , ‘모텟’ 제외), 스스로의 음악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 경계를 매우 절묘하게 유지하시는 방법도 궁금해졌다.


“(밴드는) 팝음악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포맷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연주하는 악단의 장점도 있지만 결국 편곡자와 지휘자가 상상한 결과이고. 3~5명의 멤버들이 각각의 개성을 녹여내면서 음악을 완성하는 형태가 한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결과를 만든 여러 증거들이 있으니까요. 

밴드 음악의 장점을 이야기한 후라서 조금 어색한 기분입니다만, 결국 제가 밴드 활동을 하며 각 파트의 역할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시퀀싱 도전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가능하게 해준 테크놀로지가 태동하던 시대에 음악을 시작한 이유도 있지요.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면 행복감도 크지만. 그런 매력을 떠나 혼자 하는 음악은 상당히 에너지가 소모되는 작업입니다.

(음악적 균형에 대해서는) 특별히 어떤 방법을 고민한 적은 없습니다. 제 정서는 Pop 음악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실험적이거나 대중적 취향을 조금 벗어난 시도를 할 때도 어느 정도 스스로 리밋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미디 음악, 시퀀싱 음악에서 윤상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故 신해철과 함께한 프로젝트 ‘노댄스’(1996.10)는 그의 전자 음악이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지 보여준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들은 질주, 달리기 등이 수록 테크노 기반의 실험적인 곡들로 평단과 마니아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 두 거물 뮤지션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였다.


“뮤지션으로서 해철 씨는 저보다 음악적 경계가 없는 친구였습니다. 하드한 락이나 헤비메탈, 실험적인 일렉트로닉, 때로는 감성 충만한 발라드까지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대단했고, 머리로 생각한 걸 실행하는 속도나 에너지도 비교할 사람이 없을 만큼 대단한 아티스트죠.”


그는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흩어진 나날들을 프로듀싱하며 강수지를 최고의 아이돌로 성공시키면서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프로듀서’ 란 명칭으로 불린 흔치 않은 세대이다. 그가 느끼는 요즘 케이팝 및 대한민국 대중음악 ’프로듀서’ 와 당시 ‘프로듀서’의 프로듀싱 방법이나 기법들의 차이도 궁금해졌다.


“본질적으로 아티스트의 가장 멋진 연주와 노래를 이끌어내는 역할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와 분명히 다른 한 가지는 실행취소(Undo)버튼의 탄생인데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테이프으로 녹음을 했기 때문에, 여러 이유로 좋았던 순간을 놓쳐버리는 일 이 많았죠 하지만 실행취소의 탄생으로 엔지니어들과 녹음 때 전쟁 같은 긴장감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군 제대 후 발매한 비정규 앨범 ‘레나시미엔토’ (1996.05)에서 정규 2집 파트 2보다 더 깊어지고 세련된 사운드로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가수들을 섭외하여 기존 곡들을 그 나라 언어로 번언하여 마치 제3세계 음악을 듣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 본인의 색을 대중적으로 녹여내기 시작, 특유의 밀도 있는 사운드 서정적인 멜로디의 감성으로 가장 윤상 다운 앨범으로 평가받는 ‘insensible’을 1998년 5월 발표했으며, 2000년 정규 3집 클리셰 (cliche)까지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악 활동도 이어갔다. 

이후 mbc 라디오 윤상의 음악살롱 DJ로 활동하며 제이, 박효신, 박화요비의 작/편곡가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당시 윤상의 음악 스타일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받았던 sm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게 되며, 이 시점부터 윤상의 곡을 아이돌 가수들의 앨범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보아의 3집 앨범 ‘the show must go on’ 은 수록된 다른 곡들과 다른 독특한 신스 사운드 메이킹과 유니크한 리듬 트랙이 매력적인 곡으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팬들의 우려와 달리 그만의 색깔과 월드뮤직 성향이 돋보이는 4집 ‘이사’(2002)를 발매하게 된다. 


“(SM계약의 경우) IMF 즈음으로 기억됩니다만, 제 음반을 계약했던 회사가 갑자기 음악사업을 중단한다는 이유로 계약금 반환 요청을 해왔습니다. 때문에 몇몇 회사와 이야기가 오갔고, 그중 제 상황을 가장 이해해 준 분이 이수만 대표님 이였습니다. SM은 제 음반 유통만 담당하면서 음악적인 부분은 전적으로 저에게 맡겨주었기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돌 음악과 발라드 음악의 작법차이는) 리듬 트랙부터 발라드와는 다른 개념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정서적으로는 제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을 수 없겠지만 편곡 작업에서 그 시대를 크게 관통하는 스타일을 캣치해서 저의 색깔로 조금씩 변형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월드뮤직에 대해서) 소위 월드뮤직이라 불리던 남미/유럽의 음악은 중고교 시절부터 국내 FM 라디오를 통해 접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영미 팝 음악과는 사뭇 다른 정서를 동경해 왔습니다. 제가 군 복무 시절 박창학 씨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보다 많은 다양한 나라의 음악들을 저에게 소개해 주었고, 전역 후 만드는 첫 앨범은 내 노래를 유럽 출신 가수들을 초대해서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자연스럽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4집을 구상할 때도 이전까지 저의 작업들이 너무 전자악기의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소위 월드뮤직의 매력에 깊이 빠져있었기도 해서 모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마침 일본에서 공부 중이던 박창학 씨의 지인이 브라질 음악을 하는 일본 밴드 “발란사”의 멤버란 사실도 알게 되면서... 여러 상황이 자연스럽게 어쿠스틱 음악에 대한 저의 니즈를 해결할 수 있는 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정규 5집도 발표하고 당시 인기 있었던 가수들과 작업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2003년, 그는 돌연 유학을 떠난다. 버클리 뮤직 뮤직 신서 신스, NYU 뮤직 테크널러지 학사, 석사 과정의 긴 유학생활 이었다. 그리고 2010년, 마침내 긴 유학 생활을 정리 후 귀국하여 대학교에 교수로 취임하여 후진 양성과 후배 가수들의 작곡가, 라디오 디제이(윤상의 팝스팝스), 오디션 프로그램 멘토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2002년 아내와 결혼하면서 지금이 아니면 유학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생각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음악을 독학하면서 버클리로의 유학은 언젠가 꼭 이루어야 할 목표처럼 머릿속에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동료 뮤지션들도 적지 않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모두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죠. 김동률 씨가 먼저 유학을 시작하면서 보내준 소식들을 통해 마음을 굳히게 되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아이돌 작업에 대해 좋게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학을 시작하고 3~4년 동안 아주 몇 곡 외의 작업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쌓였던 에너지? 를 그 작업들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웃음). 송북은 말씀하신 대로 박창학 씨의 프로듀싱으로 완성된 앨범이어서 저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참여해 준 동료 뮤지션들이 보내준 응원에 감사한 마음을 바탕으로 좀 더 분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귀국에 대해)솔직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사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웃음)

NYU를 마칠 즈음 먼저 졸업한 선배 프로듀서가 마침 DJ를 제안해 주었고, 비슷한 타이밍에 초빙교수를 제안 받았는데 졸업 후 거취 문제를 고민하던 상황이라 망설임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저 먼저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 그는 곧장 2010년 10월 가인의 ‘돌이킬 수 없는’, 2011년 2월 아이유의 ‘나만 몰랐던 이야기’, 2014년 1월 레인보우 블랙 ‘cha cha’를 작곡하다 본격적으로 다 빈크 (davink),  스페이스카우보이 (space cowboy)와 함께 원피스 (1piece)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아이돌 음악을  프로듀싱하게 된다. 2014년 11월 데뷔한 걸그룹 ‘러블리즈’ 총괄 프로듀싱을 맡으며 이른바 ‘러블리즈’의 아버지로 불리우기도 했다.


“돌아보면 모든 상황이 저 혼자만의 결단이나 욕심으로 만들어진 건 없는 듯합니다.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이스카우보이 (spacecowboy)와 다빈크 (Davink) 를 만나 마치 오랜 친구처럼 편안한 관계가 만들어졌고, 원피스 (1piece) 를 결성한 이유는 ‘러블리즈’라는 신인 팀의 프로듀싱 제의를 받고 혼자서 엄두가 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두 친구들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BTS를 비롯하여 수많은 케이팝 아이돌의 인기가 끝을 모르게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케이팝이 선두에 서서 대한민국의 음악 콘텐츠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음악 생활을 30년 이상 이어오면서 발라드부터 전자음악, 케이팝까지 이 모든 흐름을 경험하고 지켜본 산증인이다. 

그런 그가 그리는 대한민국 음악 콘텐츠의 미래와 그것을 발전시켜줄 후배 뮤지션 및 관계자들에게 하고픈 말을 옮겨보았다.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땐 상상할 수 없었던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 매력적이고 재능 있는 뮤지션들을 만나왔지만 그들 모두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음악적 가치나 비전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진행된 부분도 많아서 앞으로 우리 음악 콘텐츠가 어떠해야 한다는 이야기 보다, 지금까지 성장해온 K-pop을 보다 견고하게 그 매력을 잃지 않도록 내실을 쌓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최선을 다한다고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역시 꿈은 상상한 만큼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음악 안에서 꿈을 꾸는 분들 모두 상상했던 현실을 마주할 수 있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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