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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방탄소년단 [Proof] 앨범 다시 듣기

방탄소년단은 가수다. 전 세계 인구 1/10 정도는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을 가수로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UN 국제회의 연사, 걸어 다니는 기업, 언급만 하면 하트와 리트윗이 터지는 화제의 중심, 모두가 카메라를 꺼내 들게 만드는 셀럽 중의 셀럽, 스포츠 선수처럼 늘 기록으로 중계되는 사람들.  


그런 방탄소년단이 9년 동안의 음악 활동을 정리한 앤솔로지 앨범 [Proof]를 발표했다. 총 3장의 CD에 방탄소년단의 역대 앨범 타이틀과 데모곡, <Yet To Come> 등 신곡을 포함한 엄선된 48개의 트랙이 실렸다. ‘Proof’라는 이름대로 이 앨범에서 방탄소년단은 증명한다. 그 모든 유명세의 유일한 이유는, 방탄소년단이 좋은 음악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수 방탄소년단


[Proof]의 포문을 여는 첫 번째 트랙은 <Born Singer>이다. 2013년 7월 9일, 방탄소년단의 거대한 역사를 함께 쓴 팬클럽 ‘A.R.M.Y’의 이름이 팬카페에서 확정된 날, 공식 사운드클라우드 계정에 올라온 샘플링 곡이다. 방탄소년단이 데뷔 무대에서 느낀 뜨거운 소회와 야망을 표현한 노래로 원곡은 제이 콜의 <Born Sinner>(2013)이다. 


<Born Singer>가 실린 CD1은 방탄소년단의 대표곡만 모은 명예의 전당이다. 뮤직비디오 조회수 약 15.5억(2022.7.13. 기준)으로 발표곡 중 가장 높은 <작은 것들을 위한 시>(2019),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Map of the soul :7](2020)의 타이틀곡 <ON>, 빌보드 싱글 차트 9주 1위를 기록한 <Butter>(2021) 등 소속사 하이브의 종목토론 게시판을 들썩이게 한 트랙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왜 9년 동안 사운드클라우드에서 무료로 스트리밍 됐던 <Born Singer>가 첫 번째 순서일까. 


<Born Singer>는 방탄소년단의 기원이다. 데뷔 27일 차에 공개된 이 노래는 심오한 메시지나 고차원적인 콘셉트 없이 방탄소년단이 무대에서 느낀 순수한 행복과 전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Born Singer>에 담긴 온도와 진정성은 ‘가수 방탄소년단’의 유일한 본질이자, 타이틀곡 <Yet To Come>에서 말하는 긴긴 원을 돌아 결국 돌아가야 하는 ‘제자리’이다. 방탄소년단이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디움 무대에 서고 ‘시가총액’ 규모로 환산되는 매출을 기록하며, 작고 어설펐던 데뷔 무대에서 더 먼 존재가 되어갈수록 이 노래가 팬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이유다. <Born Singer>는 방탄소년단을 포위한 빛과 어둠, 화제와 논란, 상찬과 비난을 걷어내고 선명하게 ‘가수 방탄소년단’을 응시하게 만든다. 


방탄소년단은 복잡하다. 지난 5월 진행된 미국 바이든 대통령과의 짧은 회견은, 방탄소년단의 막강한 국제적 영향력과 더불어 그만큼 복잡한 그룹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한국 국적의 방탄소년단은 미국의 ‘아시아·하와이 원주민·태평양 제도 주민(AANHPI) 유산의 달’을 기리기 위해 백악관을 방문해, 미국법인 ‘아시안 증오범죄 방지 법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를 주도한 리더 RM은 가수라기보다는 노련한 외교관 같았다. 완벽히 절제된 공적 언어와 태도로 방탄소년단이 대변하게 된 미국 내 아시안 아메리칸과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익을 성공적이고 매력적으로 옹호했다. 


그것은 정말 외교였다. 방탄소년단과 바이든 정부 두 주체의 이익이 대등하게 교환됐다. 바이든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아시안인 방탄소년단을 섭외해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AANHPI 커뮤니티의 표심을 공략했다. 방탄소년단은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목소리를 내며 외국인이라는 한계로 주변화되었던 인기와 위상을 주류화했고, 강력한 팬덤 기반인 아시안 커뮤니티와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도 거뒀다. 이 ‘외교’의 승자는 단연코 방탄소년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승리가 ‘가수 방탄소년단’에게 쾌거이기만 했을까? 혹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하기 위해선, 그래미 어워드에서 상을 타기 위해선 백악관까지 가야 하는가?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이런 의문을 갖지는 않았을까.


[Proof] 앨범은 <Born Singer> 수록을 통해 전 세계의 음악, 산업, 사조 등에 영향을 끼치는 거대한 이름이 된 방탄소년단의 유일한 본질은 ‘가수 방탄소년단’이라고 재정의하며 ‘제자리’로의 회귀를 선언한다. 기자, 유튜버, 정치인, 평론가가 아닌 당사자 방탄소년단의 목소리로. 


사막에서 바다로


타이틀곡 <Yet To Come>은 방탄소년단이 얼마 전 개념을 설명한 그룹 위주의 ‘활동 챕터 1’의 엔딩 테마곡이다. 엔딩 테마곡답게 <Yet To Come>에는 방탄소년단의 수많은 대표작들이 교차된다. 먼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뜻의 제목은 방탄소년단에게 첫 1위 트로피를 안겨준 [화양연화] 앨범 3부작과 연결돼 ‘화양연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메시지를 완성하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든다. 


역대 활동 곡의 대표 시퀀스를 모아 압축한 뮤직비디오는, 사막에서 조난된 듯 멈춘 버스 안에서 7명의 멤버가 꿈꾸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파도가 철썩이고 갈매기가 끼룩대는 효과음이 해풍처럼 감격적으로 장면을 감싸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건 황량한 미국 ‘데스밸리(Death Valley)’ 사막이다. 지구에서 가장 메마른 땅, 2억 년 전에는 바다였던 땅, 황금광을 찾아 서부로 온 외부자들에게 처음 발견된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방탄소년단이 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답은 [LOVE YOURSELF 承 'Her'] 앨범(2017) 비하인드 트랙인 <바다>에서 찾을 수 있다. 성공의 딜레마를 바다와 사막에 비유한 진솔한 가사와 매력적인 메타포로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이 노래는, [Proof]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모순적으로 [Proof]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다. 


<바다>는 방탄소년단의 역경 서사와 팬덤 A.R.M.Y를 연결하는 ‘우리 함께라면 사막도 바다가 돼’ 세계관의 모태이다. 이 세계관은 2017년 12월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윙즈 파이널 콘서트’에서 태어났다. ‘윙즈 파이널 콘서트’는 음악방송 출연 기회도 변변히 얻지 못한 ‘별거 없는 중소 아이돌’이었던 방탄소년단이, 데뷔 4년 만에 그해 가장 많은 음반을 팔고 국내에서 가장 큰 실내 공연장을 매진시키는 ‘초대형 아이돌’이 됐음을 똑똑히 증명하는 콘서트였다. 방탄소년단과 A.R.M.Y가 함께 쓴 이 기적적인 반전 서사가 <바다>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콘서트에서 구현되며, 사막과 바다는 방탄소년단과 A.R.M.Y가 함께 겪어온 여정의 상징이 됐다. 


<바다>의 세계관은 <Yet To Come>에서 또 한 번 구현된다. 뮤직비디오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온화한 모래 언덕과 새파란 하늘이 접하며 만드는, 마치 해변을 연상시키는 지평선은 바다에서 해변을, 해변에서 사막을 보는 <바다>의 공간을 그려낸 것처럼 보인다. 그 공간에서 숨 쉬고, 노래하고, 달리던 방탄소년단이 맞이하는 엔딩의 해답도 <바다>의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꿈꾸듯 바라본 것은 챕터 2라는 ‘또 다른 사막’이다. 


“가장 아름다운 날들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났다. 길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 길 위에 보잘것없던 일곱 소년의 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뛰고 있었다. 이제 우리 앞에는 한 번도 꿈꾸어보지 못한 꿈이 놓여 있다.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절망이 있다. 바다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사막을 건너야 하는 것. 또 다른 사막을 찾아 우리는 다시 걷는다.” - ‘윙즈 파이널 콘서트’ 오프닝 VCR 중


2022년 6월 13일, 방탄소년단 데뷔 9주년 기념일에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스트리밍 된 ‘[Proof] 라이브’는 데스밸리의 ‘돌로레스 워터파크(Dolores Waterpark)’에서 촬영됐다. 폐장된 지 오래인 물이 없는 워터파크에서 방탄소년단은 바다 빛의 푸른 옷을 입고 [Proof]의 대표 수록곡을 부른다. 6월 13일, 데뷔일이라는 ‘제자리’에서, 그들은 사막에서 바다가 된다. 방탄소년단의 챕터 1은 이렇게 완결된다. 


화양연화는 아직


에드워드 올비의 장편 희곡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중년의 대학교수 조지가 16살이던 어느 날, 뉴욕의 한 뒷골목 술집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술에 취했던 날의 이야기를 한참 떠들다가, “그때가 내 젊은 시절의 가장 멋진 날이었네”라고 덧붙이며 긴 대사의 방점을 찍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 언제인지는 먼 훗날 돌이켜봐야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최고’로 헤드라인이 시작되는 뉴스를 수만 개쯤 만든 방탄소년단의 최고의 순간이 언제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들은 아직 달려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의 ‘활동 챕터 2’가 시작됐다. 7명의 멤버는 앞으로 다양할 방식으로 ‘방탄소년단’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갈 예정이다. 챕터 2라는 ‘또 다른 사막’에서 방탄소년단이 ‘한 번도 꿈꾸어 보지 못한 꿈’을 이룰 수 있기를 응원한다. 

 
< 사진 제공 - 빅히트 뮤직 (BIGHIT MUSI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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