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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클래식 <해뜰날>을 표절한 빌보드 핫100 1위 곡?

K-국민가요 송대관의 1975년 발표곡 <해뜰날>을 검색하면, 1982년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 무려 6주 동안 1위를 한 J. Geils Band <Centerfold>가 나온다. 한국에선 <Centerfold>를 검색해도 <해뜰날>이 나온다. 장발단속과 야간통행 금지가 있던 독재 정권 시절의건전가요’ <해뜰날>과 첫사랑이 포르노 잡지 모델이 되어 빡친다는 내용의불건전 가요’ <Centerfold>는 어떻게 연관검색으로 묶이게 되었을까?

 

한국에서 <Centerfold> “<해뜰날> 표절곡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975년의 한국 경찰이 J. Geils Band 멤버들의 긴 머리를 봤다면 이발 가위를 들고 쫓아왔을지도 모를 만큼 두 노래의 배경과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Centerfold> 전주에 맞춰 <해뜰날>을 부를 수 있을 만큼 테마 리듬이 유사하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012 11 1프레시안에 기고한 칼럼 <싸이 성공담에서 표절 당한 송대관을 생각한다>에서표절이 분명하며, 가수 송대관 씨와 작곡자 신대성 씨는 <Centerfold> 곡의 원저자에 가까운 대접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Centerfold> <해뜰날>을 정말 표절했을까? <Centerfold>가 발표된지 40, J. Geils Band의 리더 J. Geils가 사망한지 5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해뜰날>의 저작권과는 아무 상관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40년 동안 <해뜰날> <Centerfold>가 표절했을지도 모른다고 떠들고 있을 뿐이다.

 




 

 
​<해뜰날>과 함께, K-POP 역사 산책 

1976년은 송대관의 해였다.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쳐 내 인생에도쨍하고 해뜰날이 있기를 바라며 직접 작사한 노래 <해뜰날>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최고인기가수상과 최고인기가요상을 수상했다. 흑백 TV 수상기가 280만여 대를 기록한 해, 최고인기가수를 가리기 위해 MBC로 도착한 42만여 통의 엽서 중 송대관은 전체 득표수의 약 40% 17만여 표를 얻었다. 참고로 그 시상식에서 K-POP의 단군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이 남자 신인가수상을 받았다

 

사실 <해뜰날>의 최고인기가요상 수상은 요즘 말로빈집털이였다. 바야흐로 1975.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아래, 집회·시위의 자유와 방송·통신·음반 등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다. <KBS 영상실록>은 그 시기를유신의 암흑 정치 절정기라고 설명한다. 긴급조치 9호의공연활동 정화방침에 따라 수많은 인기가요들이 허무, 비탄, 애상, 불건전, 치졸 등의 정서를 담았다는 이유로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출근길에 느끼는 모든 감정이 금지였다는 의미다. 일례로 한대수의 노래물 좀  주소’(1974)가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 당했다. 연이어 연예계 대마초 파동이 일어나며 많은 인기가수들이 방송정지 당하거나 구속됐다. 유신헌법 재신임 부정 투표 논란, 인혁당 사건 등 정치문제를 연예계 스캔들로 덮기 위해 대중문화에 더 서슬 퍼런 검열의 총칼이 드리워진 해였다.

 

만만한 경쟁상대가 없긴 했지만, <해뜰날> 1976년 최고의 노래가 분명했다. 그해는 탈식민지 전후 국가 대한민국의 배고픔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해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먹고 남을 만큼 쌀이 수확됐다. 1977년엔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자력갱생 정신을 담은 <해뜰날>은 민족의 가슴에 내 인생에도쨍하고 해뜰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참고로, 현재 한국은 1인당 육류, 채소, 수산물 소비량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나라로 경제성장을 이뤘다.

 

국사 교과서에 실려야 할 것 같은 이 노래와 포르노 잡지 Center(가운데) fold(접히다), 가장 크고 선정적인 사진이 실리는 페이지를 뜻하는 <Centerfold>의 유사성이 공론화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표절, 진실 혹은 거짓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해뜰날> <Centerfold>의 유사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두 노래의 분위기가 너무 다르기 때문도 있지만, 당사자인 송대관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문화 사대주의의 영향으로천조국의 빌보드 핫100차트 1위 곡이 한국의 트로트 가요를 표절했을 리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뜰날>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만한 매력적인 노래라는 사실보다는, J. Geils Band <해뜰날>을 들었을 가능성을 추리하는 데 더 골몰한다.

 

작곡가가 주한 미군이었다는 썰이 가장 신빙성 있게 거론되는데, 이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194(2016.01.01.)진실 혹은 거짓코너의 거짓 에피소드였다. 사실이 아니다. J. Geils Band 1980 6월 일본 콘서트 투어 중 접했을 가능성도 이야기 된다. 1980년엔 인스타그램이 없어서 J. Geils Band가 신오쿠보의 삼겹살 맛집을 태그하지 못했으니 알 길이 없다. 당시 <해뜰날>과 일본의 관련성은 같은 한국인인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일본에서 히트를 쳤다는 사실 정도밖에 없는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무슨 상관인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좋은 것은 언제나 국경을 넘었다.

 

송대관이 진작에 법적으로 표절 여부를 가렸더라면, 이런 시시한 탐정놀이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왜 40년 째 권리 위에서 잠자고 있는 걸까?

 

<Centerfold>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를 한 1982, 송대관은 또 다른 해뜰날을 꿈꾸며 미국에서 이민생활 중이었다. 당시 많은 한인 이민자들처럼 적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청과물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청과물점을 한다는 건, 새벽 3시에 밥을 지어먹고 도매시장으로 출근해서 밤 10시에 퇴근해서 잠드는 생활을 했다는 의미이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미국에서 고달픈 이민생활을 하던 송대관이 저작권 개념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시절에, U2와 영국 투어를 다니던 J. Geils Band를 어떻게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단칸방의 좁은 창문으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젊음의 격정을 쏟아 만든 <해뜰날>이 미국의 낯선 거리에서 울려 퍼졌을 때, 그가 느꼈을 당혹과 분노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송대관이 8년의 이민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가수로 재기에 성공했을 때 J. Geils Band는 이미 해체한 상태였다. 송대관에겐 표절 문제를 마음에 묻고 끝내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결론은 <해뜰날> <Centerfold>가 표절했는지 법적으로 가리는 것보다, 두 노래의 저작권이 소멸되는 시점이 더 빠를 것 같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송대관의 또 다른 히트곡네 박자의 가사처럼울고 웃는 인생사. 소설 같은 세상사. 세상사 모두가 네 박자 쿵짝인 것을.

 

최이삭 Isak Choi

instagram @isakchoi


<사진 제공 - 은설기획, 오아시스 레코오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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