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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RM, 자유

 

"거대한 인간들의 사막을 횡단하며 여행하는 이 고독한 사람" 샤를 보들레르가 <현대 생활의 화가>에서 인상주의 화가를 표현한 이 문장은 RM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마치 인상주의 화가처럼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으로 뛰어 들어가 열렬한 산책가의 눈으로 선유도와 한남대로의 풍경, 풀벌레 소리와 자전거 위의 풍요한 바람을 한 폭에 담았다.

그러나 RM이 군 복무 중에 발표한 흥미로운 신보 [Right Place, Wrong Person]에서 그는 이제껏 그려온 목가적인 풍경 위를 훌쩍 날아오른다. "난 누워 들판 속에, 시선을 던져 하늘 위에" 전작 [Indigo](2022)의 타이틀 <들꽃놀이>에서 갈망하던 그 하늘로 솟구쳐 장르와 형식의 층계를 가르고, 자아의 안과 밖을 뛰어넘으며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평생 물어온 질문, 아마 평생 정답은 찾지 못할 그 질문" <Intro : Persona>(2019)의 신성한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그저 흠뻑 노래한다. "You don't have to be the anything you see(네가 보는 무언가가 될 필요는 없어)"라고. 

 

미로에서

뮤지션으로서 RM은 늘 나눌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진 사람 같았다. 정규 1집 [Indigo]는 간절한 기도였다. RM이 한 땀 한 땀 직조한 태피스트리 같은 이 앨범에서 그는 초탈로써 자유를 얻고자 했다. 믹스테이프 [mono](2018)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수용을 통해 모순적인 자유를 구했다. RM의 음악은 BTS의 리더라는 무거운 사명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심오한 수행의 길 같았다. 세상은 그를 새로운 리더십의 상징이자 'K'의 대변자로 추대하고 평가해 왔다. 그러나 [Right Place, Wrong Person]에서 RM은 이 영예롭지만 엄혹한 굴레에서 스스로를 해방한다. 무엇도 대표하지 않는 'R'eal 'M'e, 대문자 나 자신을 찾기 위해. 

[Right Place, Wrong Person]이 상정하는 공간은 미로다. 미로란 무엇인가. 오롯이 자유를 갈망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자유란 생존본능이자 희망이다. 타이틀 <LOST!>는 미로에 갇힌 RM의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자유의 정체성을 형상화하고, 방향을 상실한 자의 비애를 경쾌하고 우연성 가득한 멜로디로 역설적으로 느끼게 한다. 뮤직비디오에서는 마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처럼 존재의 축축하고 불연속적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RM의 각기 다른 정체성들은 그룹을 지어 나 자신이라는 미로를 헤맨다. 출구를 찾아 빠져나와도 미로는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또 다른 출구를 찾아 나선다. <LOST!>가 구현하는 자유란 어딘지 알 수 없는 길 끝에 놓인 트로피가 아니다. 계속해서 출구를 찾아 나서는 의지와 시도 그 자체에 고장 난 전구처럼 깜빡이며 가끔 깃들어 있는 어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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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곡 <Come back to me>는 이 앨범의 철학과 색채를 대표한다. 이 노래는 사랑도, 그로 인한 고통도 계절처럼 순환한다고 말하며 관조를 통한 자유를 표현한다. 뮤직비디오는 미로 같은 멀티버스 세계관에서 인과 연의 순리에 따라 존재를 거듭하는 RM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숙명 앞의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질문하지만, 결국 관조하는 만큼 굳건해지는 결말을 맺는다.

잘 알려졌다시피 <Come back to me>의 뮤직비디오 크레딧은 대단하다. 에미상 감독상 등을 수상한 <성난 사람들>의 이성진 감독이 연출과 제작, 극본을 맡았다. 재일교포 1세대의 삶과 한을 그린 드라마 <파친코>의 주연 김민하가 출연했다. 미술은 영화 <헤어질 결심>, <암살> 등에 참여하며 한국적인 동시에 무국적적인 특별한 미장센을 구축해 온 류성희 미술감독이 맡았다. 이 조합은 다만 <Come back to me>의 뮤직비디오가 블록버스터급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장 돌출되고 영감적인 'K'의 정체성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모여 장르와 형식을 허무는 [Right Place, Wrong Person]의 도전과 디아스포라적인 세계관을 완성한다.

가장 독창적인 트랙은 단연 <Domodachi>일 것이다. 언어의 맛을 극대화한 타격감 좋은 랩과 만화경 같은 사운드로 장르로부터의 자유를 관철한다. 뮤직비디오는 차원의 문을 넘은 한 소년이 림보의 심연 같은 세상만사를 탐험하는 모습을 그린다. 모든 힘과 파편이 후렴인 "みんな友達ここで踊りましょう(친구여 여기에서 춤을 춥시다)"로 흘러 폭발할 때는,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며 함께 비틀비틀 춤을 추고 싶어진다. 

<Groin>에서 자유는 좀 더 정확해진다. "세상엔 재수 없는 새끼가 너무나 많아"라고 한 방 먹이며 시작하는 이 노래는, "내가 뭘 대표해, 나는 나만 대표해. 홧병 나서 죽기 전에 할 말은 하자"라며 오랫동안 악물고 있던 분노를 내뱉는다. 뮤직비디오는 시공간의 감옥 같은 나선 계단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심오한 인트로 뒤에는 "빵상 빵상" 장난스러운 라임에 맞춰 실력 없는 아마추어 복서처럼 허공으로 주먹을 날리는 '하찮은' RM의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와 똑같이 휘청이고, 거리를 활보하며 그는 온몸으로 말한다. 나는 단지 나일 뿐이라고.

 

 

해변에서

지난해 스페인 대표 일간지 '엘 파이스(El Pais)'와의 인터뷰에서 RM은 “몇십 년 후면 장르라는 단어는 사라질 것 같다"라고 말했다. R&B·하이퍼팝·저지클럽·K팝 등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음악은 사람을 특정 기분에 빠뜨리는 주파수의 축적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점은 현재 K팝 산업이 돌진하고 있는 목표인 '탈 K'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구권에도 어필하는 팝적인 음악으로 'K'의 영토를 넓히겠다는 주류화 선언이 탈 K라면, RM의 관점은 음악의 미래로써 장르 그 자체의 순수한 탈경계화를 의미한다. 전자는 K를 추월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만, RM은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동일 인터뷰에서 발언해 전 국민에게 '국뽕' 한 사발씩을 돌린 "(K는) 선조들이 싸워 일궈낸 프리미엄 마크"라는 정의의 본질일 것이다. 이 확고하고 고유한 정체성은 뮤지션으로서 RM이 가진 가장 예리한 무기 중 하나이다. 정체성이 음악의 지평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RM은 K팝의 경계를 허물며 음악적 지평을 넓혀왔다. 이 여정이 본격화된 건 2018년에 발표한 두 번째 믹스테이프 [mono]부터라고 할 수 있다. 국적과 장르, 멋과 서사가 서로 다른 아티스트들과 함께 새로운 바이브의 앨범을 만들었다. 이후 릴 나스 엑스, 윤하, 황소윤 등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뮤지션들과 경계 없이 협업하며 K팝 신(Scene)을 확장해오기도 했다. 정규 1집 [Indigo]에서는 윤형근 화백의 세계를 오마주 하여 음악과 미술을 잇는 독창적이고 심미적인 앨범을 완성했다. 

[Right Place, Wrong Person]에서 RM은 K팝의 모든 정형의 빗장을 푼다. 이 앨범은 마치 해변 같다. Right과 Wrong, 국적과 문화, 인디와 메이저, 장르와 형식의 경계는 사라지고 그저 RM이라는 해변에서 철썩인다. 가장 결정적인 물결은 바밍 타이거 멤버 산얀의 프로듀싱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주류 K팝의 문법을 전복하는 창조적 스타일의 아티스트가 제작의 키를 쥐며 태생적으로 탈정형적인 앨범이 전개됐다. 

파도 같은 변칙성과 물장구 같은 낙천성이 만져지는 이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확고한 정체성의 합을 의미한다. 단지 서로 다른 것을 비빔밥처럼 섞는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성공한 다양성은 가장 사적이고 진실한 개별성을 드러낸다. [Right Place, Wrong Person]에는 고유한 질감과 철학을 가진 전방위 아티스트들이 RM의 지평 안으로 흘러와 역동적으로 교차한다. 고뇌하는 젊은 아티스트이자, 수많은 사명과 책임을 짊어진 BTS의 리더 RM의 미로 같은 페르소나를 해체하고 탐험하며, 새로운 주파수를 탄생시킨다. '롤링스톤'과 '빌보드', 'NME' 등 유수의 매체들이 [Right Place, Wrong Person]을 2024년 상반기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꼽은 이유는 여기에 담긴 새로운 주파수의 강렬함 때문일 것이다. 

 

 

순간에서

"아무리 길고 복잡한 운명이라 할지라도, 모든 삶은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게 되는 순간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타데오 이시도르 크루스>의 한 대목이다. 뮤지션으로서 RM의 삶은 이 '단 하나의 순간'을 향한 길고 복잡한 여정이었다. [Right Place, Wrong Person]은 이 길에서 RM이 세운 또 하나의 지표다. 미로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게 해줄 확실하고 아름다운 지표들과 함께 RM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강렬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사진 제공 - 빅히트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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