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컬로이드나 우타이테, 버추얼 유튜버와 같은 단어들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글을 보는 대다수는 아마 이러한 용어들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대신해주는 음성합성 소프트웨어인 보컬로이드가 일본에서 첫 선을 보인 지도 어언 20년, ‘하츠네 미쿠’라는 캐릭터로 본격화된 그 가능성은 수많은 ‘방구석 뮤지션’들을 현 음악 신의 주역으로 탈바꿈 시켰다.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도가(ニコニコ動画)’를 중심으로 수많은 오리지널 곡들이 업로드되었고, 이 노래들을 커버하는 아마추어 개념의 ‘우타이테’가 가세하며 전에는 본 적 없던 웹 문화 생태계가 구축된 것이다. 더불어 최근엔 VR과 메타버스 등을 활용한 일종의 ‘사이버 부캐’인 버추얼 유튜버가 음악 등과 연계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까지 읽은 이들은 ‘그래서 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는 바다 건너 열도의 이야기가 아닌가. 필자도 1년 전이었다면 굳이 이런 주제로 글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는 이유는, 최근 감지되는 국내 서브컬쳐 신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비록 작곡가 앰프스타일의 안타까운 부고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그가 속해 있었던 유닛 달의 하루가 부른 <염라>가 2년 만에 1,800만 조회수를 돌파했다. 각각 427만명과 87만명의 채널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우타이테 라온과 다즈비는 작년 11월 유니버설 뮤직 재팬과 계약하며 정식 데뷔를 알렸고, 크리에이터 우왁굳에 의해 기획된 버추얼 스트리머 그룹 이세계아이돌은 예상 이상의 인기를 얻으며 순항 중이다. 그런가 하면 성우 서유리가 발족한 버추얼 인플루언서 전문 기업인 주식회사 ‘로나 유니버스’ 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마니악한 지형도가 이 정도로 격렬히 요동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다.
많은 이들에게 ‘캐주얼한 기회’를 제공하는 서브컬쳐 신
아직까지는 ‘마니아 문화’에 머물러 있지만, 위 사례들로 미루어 보아 10~20대를 중심으로 그 지분을 확장해 나가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보컬로이드와 우타이테, 버추얼유튜버와 같은 서브컬쳐 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적으로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캐주얼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크지 않을까 싶다. 아티스트로서의 재능을 만인에게 인정받고 싶다 한들, 그것이 유명해지기를 원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될 수는 없다. 특히 극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며 무의식중에 습득된 자기혐오는,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을 더욱 주저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애초에 자신의 신변을 공개하지 않고도 활동해 나갈 수 있는 이곳이 활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하는 K-pop과는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국의 아이돌 시스템은 어릴 때부터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것을 포기해야 함과 동시에 경쟁과 비교에 상시 시달려야 한다. 더불어 성공 확률도 극히 낮으며 데뷔 후에도 여러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수가 되고 싶은 10대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거의 동일한 체계의 시스템을 강요받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혹자는 아이돌 그룹 외에도 많은 데뷔 형태가 있음을 지적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서 가요계에서 확실한 성공모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기획사를 거친 K-pop이 거의 유일하다. 꿈을 쫓는 이들은 확실한 롤 모델이 있는 곳으로 그 발걸음을 내딛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이 웹 기반의 문화 생태계가 꽤 괜찮은 돌파구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인디펜던트’
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어떠한 강요나 개입 없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는 점도 포인트다. 버추얼 유튜버의 경우 장비나 시스템 등의 이유로 회사를 동반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지만, 보컬로이드나 우타이테의 경우 집에서 작업한 결과물로 시작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타인의 개입이 없는, 순도 높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펼쳐 보일 수 있다는 점, 이와 함께 즉각적으로 다른 이들의 피드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그야말로 묵혀 있던 창작욕구를 해소하기에 적합한 루트인 것이다.
많은 창작물과 의견이 오가는 웹사이트 ‘아트리’를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많은 클럽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1990년대 홍대가 떠오르기도 한다. 순수한 아티스트들의 의지만으로 팬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그 결을 같이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자주 제작’이라는 것이 인디의 개념이라면, 사실 이들이 구축하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Z세대가 주축이 된 ‘2022년의 인디신’이 아닐까.
겨우내 시작된 그 가능성.
일본에서는 이미 요네즈 켄시나 요아소비와 같은 보컬로이드/우타이테 출신 아티스트들이 탑스타로 군림하고 있으며, 다수의 버추얼 라이버를 보유하고 있는 니지산지는 국내를 포함한 전세계로 사업을 확장해 가는 중이다. 이러한 서브컬쳐의 성장은 많은 가짓수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나라는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매우 좁다. 이마저도 개인이 리드할 수 있는 측면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물론 개인의 역량이 기본이 되어야 하겠지만, 기획사의 영향력이나 A&R의 역량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확률이 더 크다. 성공을 거둔 후에도 24시간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생활 제로의 세계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싶지만 ‘K-pop 스타’가 되고 싶지는 않은 이들, 자신의 재능을 다른 방법과 경로를 통해 인정받고 싶은 이들에게 분명 좋은 대안이 될 것이다.
다만, 아직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아직까지 이 루트를 통해 범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사례가 없다는 점, 이로 인해 메이저 레이블이나 유통사를 통한 데뷔 프로세스의 예시가 아직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룹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세계아이돌도 한 크리에이트에 의한 개인 프로젝트에 가까운 실정. 이는 아직 메인스트림에서 눈여겨볼 정도의 수요가 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아직 이 서브컬쳐 신에 대한 시선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는 사실이다. 더불어 아마추어에 가까운 활동 형태인 만큼, ‘프로의식’을 가지고 임하는 아티스트들이 많지 않다는 점도 생각해 볼 문제다.
일본 역시 이러한 흐름이 보편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는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활동해 다져 놓은 탄탄한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상황에서, 범 대중적인 스타 탄생을 논하는 것이 아직은 시기 상조에 가깝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열도로부터 건너 온 이 하위문화에 굳이 관심을 보이고 응원해 줄 필요가 있느냐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K-pop 일변도의 한국에서, 아이돌 지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가슴에 묻어둔 채 살아갈 원석들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서브컬쳐 신이 하루빨리 커지기를 희망한다. 잠재력을 손에 쥔 채 시대와 평행선을 걸어가고 있는 ‘이세계 크리에이터들’의 반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사진 제공 - 게임'에이팀'의 '하츠네미쿠탭'원더,로나 유니버스,소니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