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린 스타트아트페어. 그곳을 환하게 밝힌 유수의 작품과 작가, 그 사이에 현대미술 작가 레지나킴이 있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난 작품은 과감한 색감과 드라마틱한 형태로 시선을 앗고, 그 안에선 자연과 생물이 계속해서 피어나며 어우러진다. 섬세한 실루엣 안쪽,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은 예술. 세상을 훤히 조명하는 레지나킴의 초현실적 세계로 초대한다.
1. [RSK] 안녕하세요, 레지나킴 작가님. 롤링스톤 독자분들에게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비주얼 아티스트 레지나킴입니다. 콜라주, 일러스트, 무빙 이미지, 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해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초현실의 세계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요. 제 작품은 ‘Beyond borders(경계를 넘어)’라는 주제로 만들어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여러 고정관념, 편견 등의 다양한 경계를 찾아 강렬하고 초현실적인 세계의 공간을 표현하며, 사회문제, 환경문제, 인권, 인간의 감정 등의 넓은 주제를 다루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그 외에도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거나 포스터 작업을 하기도 하고, 가수분들과 앨범커버 작업도 함께 하고 있어요.
2. [RSK] 미술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언제부터였어요?
사실 제가 어렸을 땐, 예술은 그림을 엄청나게 잘 그리는 사람들이 하는 분야라고 생각해서 예술가가 될 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저는 처음엔 한국에서 법 공부를 했고, 이후 원래 좋아하던 패션 공부를 하기 위해 연세대 의류환경학과에 들어가 패션을 전공했어요. 그다음 런던으로 패션 유학을 가려던 중, 패션은 저의 창의력을 펼치기에는 너무 제약적인 부분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패션은 사람이 입을 수 있는 형태여야만 해서, 제가 원하는 주제를 표현하는데 적절하지 않더라고요. 저의 창의력을 펼칠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일지 고민하던 중 런던에서 많은 갤러리와 박물관을 돌아다녔고, 그렇게 현대미술을 알게 됐어요. 이 분야가 제가 원하는 것들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는 것도요.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영국 학교 입학을 준비했고, 합격해서 런던에서 파인아트를 공부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술에 관심을 더 두게 된 것 같아요.
3. [RSK] 예술 이전에 공부하던 법과 패션이 작가님의 작품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나요?
본격적으로 예술을 하기 전에는 로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대학에서 법과 패션 공부를 했어요. 그러면서 사회, 환경, 모피와 가죽 등 이슈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나오기 힘들더라고요. 제 생각엔 법과 규제를 넘어 사회문제를 대하는 사람의 인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인식의 변화를 줄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일까 찾아보던 중 현대미술이 저에게 좋은 정답이 돼줬고, 법과 패션을 공부한 부분이 작품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인권, 환경, 성소수자, 평화, 미디어 등 주제를 다루게 됐어요.
4. [RSK] 작업실은 어떤 모습인지, 작업 공간의 풍경도 궁금해요.
내년에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게 돼서 한국에 있는 작업실은 정리한 상태인데요. 지금은 디지털이 대부분의 작업을 차지하고 있어서 집에서 작업하는 중이에요. 작업환경은 디지털 작업 위주라 디스플레이가 많은 편이에요. 특히 영상 작업의 경우에는 여러 패널이 필요해 디스플레이를 여러 대 사용 중이고요. 햇빛이 디스플레이와 제 눈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해서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작업하고 있어요. 그래서 거의 암흑 속에서 전자기기 빛과 함께 작업하고 있고요. 그래서 대신 공간을 메꿀 수 있게 소리를 좀 크게 틀어 놓고 작업을 하는 편이에요. 소리에 민감하고, 백색소음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어서 공간에 소리가 없으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음악이나 다큐, 드라마, 라디오 등을 다양하게 틀어두고 작업을 하는 편입니다. 작업 스타일에 따라 음악을 정해 듣는데 빨리 끝내야 하는 작업의 경우에는 가사 없는 EDM을 듣고, 아름답고 정적인 작업을 할 때는 잔잔한 클래식 위주로 듣는 등 작업에 따라 플레이리스트가 달라져요. 요즘에는 조명에 관심이 많아져서 작업실에 조명 세팅을 해보려고 연구 중이에요.
5. [RSK] 지금까지 참 다양한 방면으로 활동해 왔죠? 스타트아트페어, BAMA 부산 아트페어 같은 예술 전시를 하기도 하고, 포르쉐나 MAROON 5 같은 브랜드, 아티스트와 협업하기도 하면서요.
세컨드모노 콜라보
다양한 곳에서 연락을 주셔서 운이 좋게 여러 협업과 전시들을 했어요. 저는 제 작품이 전시장이나 컬렉터의 집에 걸려있는 것도 좋지만, 제 작업이 말하는 주제가 많은 대중들의 마음에 닿길 바라요. 세컨드모노와 했던 티셔츠 협업의 경우, 동물 학대, 아동 학대, 인권 등을 주제로 한 콜라주 작품을 티셔츠에 프린트해서 판매했거든요. 우리가 뉴스와 신문, SNS 등의 미디어를 통해 아동학대, 동물 학대, 인권, 환경문제 등을 자주 접하다 보니 익숙해져 버리더라고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제가 만든 작품이 어떤 문제를 표현하는지, 그리고 이 사회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며 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많은 분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티셔츠를 사신 분들께서 입고 다니시면서 저의 이야기의 전달자가 돼주시는 거죠. 그냥 보고 예쁘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구입 리뷰를 보니, ‘티셔츠 속 작품을 보며 작가는 무엇을 생각하며 이것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과 질문을 갖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앞으로 이러한 사회문제들을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대중에게 마련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드는 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예요.
런던 사치갤러리: 스타트아트페어
런던 사치갤러리는 작년에 스타트 아트 페어에 선정되어, 기안84 작가님, 오님(송민호) 작가님, 강희 작가님과 함께 전시했어요. 총 5점을 전시했고, 전부 사회문제와 인권에 대한 작품들이었어요. 유명한 기자님께서 우크라이나 작품을 보시고 꼭 기사 헤드라인에 쓰고 싶다고 하셔서 이미지를 전달했는데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을 저격한 작품이 좋았다는 피드백이 많았어요. 외국 친구들에게 직접 듣는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미디어에 나온 것보다 훨씬 처참했고, 그 부분에 조금이나마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작은 사이즈의 작품을 만들고 판매해서 기부금을 모았어요. 작품이 작품으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닌, 또 다른 형태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고 믿기에 앞으로도 이러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할 계획이에요.
뉴에라 티셔츠 콜라보
뉴에라에서도 아티스트 전시에 함께했는데, 뉴에라의 대표 캐릭터인 팔로가 대중에게 전하는 현대 인이 가져야 할 7가지 덕목에 대한 일러스트를 만들었어요. 뉴에라 대표님이 너무 좋아해 주셔서 이후 협업도 성사됐고, 미국 본사에서 꿈을 위해 하늘로 높이 날아가는 일러스트를 택해주셔서 티셔츠도 나왔어요.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셔서 저도 너무 기뻤던 협업 프로젝트 중 하나예요.
PLAYBOY NFT 프로젝트
사실 잡지사 PLAYBOY에서 남녀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패리스 힐튼이 큐레이팅한 여성 인권에 대한 전시 선정 후 PLAYBOY와 함께하는 인권 문제에 대한 공모전이 있어 작품을 냈고 선정됐어요. PLAYBOY LA 갤러리와 마이애미 아트바젤 PLAYBOY 파티에도 함께 전시됐고요. 저는 여성 인권이 중요한 만큼 남성 인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남성 집단에서도 소외당하는 남성, 소수자가 있으니까요.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약한 인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걸 작품으로 보여주고 싶어요. 이 부분은 런던에서 지내는 성소수자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느꼈던 부분이 많아 앞으로도 런던에서 지내며 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제가 그들을 위해 세상에 말하고 싶은 것을 작품에 담을 예정이에요.
6. [RSK] 최근엔 롤링스톤 맥주 일러스트 작업도 맡으셨다고요.
좋은 기회로 롤링스톤 맥주 일러스트를 맡게 되어 너무 기뻤어요. 제 일러스트를 좋아해 주셔서 더욱 감사하고요. 많은 분이 롤링스톤 콜라보를 통해 제가 무거운 주제뿐만 아니라, 밝고 유쾌한 주제에 대한 작업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봐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7. [RSK] 요즘엔 어떤 작업에 몰두하고 있나요?
요즘에는 런던 아우터넷과 사치갤러리에서 전시할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고, 좀 더 다이내믹하면서 스토리텔링을 강조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하며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아트에 대해 연구 중이에요. 그리고 내년에는 석사 과정을 마치러 런던에 가야 해서 제 작업 설명을 더 탄탄히 보충하기 위해 여러 리서치를 하면서 작업하고 있어요.
8. [RSK] 최근 특별히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는 건 없는지도 묻고 싶어요.
요즘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고 있는 건 저의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artist statement, 작가 노트)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상업적인 작품(협업)이나 포스터, 앨범 커버 등의 다양한 의뢰를 위한 작품들을 만들다 보니, 개인 작업 스토리를 밀도 있게 다질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제 작업 세계관을 튼튼히 채울 수 있도록 애정 있게 들여다보며 리서치하고 있어요.
9. [RSK] 레지나킴의 작품에는 물, 산, 구름 같은 자연물과 눈이나 손 같은 신체 부위, 그리고 동물과 식물 같은 요소가 계속해서 등장해요.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해서인지 제가 많이 접하지 못한 자연의 공간이 참 좋더라고요. 저에게 특별하면서도 편안한 곳이 자연인 것 같아요. 어떠한 분쟁도, 시끄러움도 없는 평화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무, 하늘, 구름, 꽃 같은 자연 요소가 저에게는 영감과 긍정적인 에너지가 돼주는 거 같아요. 자연이 없는 삭막한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제 대부분의 작품이 무거운 주제를 말하긴 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를 너무 어둡고 건조하게 하고 싶지 않고요. 아름답고 초현실적인 세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간과했던 어두운 부분이 보이는 작품이면 좋겠다 싶어서 아름다운 자연적 요소를 많이 넣게 되는 것 같아요.
작품에 많이 쓰이는 인체는 우리 인간을 대변하는 요소예요. 저는 보통 해체된 인체를 작품에 많이 쓰는데요. 콜라주이기에 그렇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해체된 몸과 얼굴, 손은 불완전한 인간을 상징해요. 우리 인간은 모자란 부분이 많은 생명체인데도 항상 자연이나 동물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죠. 오만한 발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권, 환경 등 주제를 다룰 때 해체된 인체를 작품에 넣곤 해요.
10. [RSK] 몽환적인 분위기와 동양적인 패턴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죠. 내 작업물의 가장 뚜렷한 정체성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콜라주와 일러스트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요. 제가 추구하는 건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가 공존하는 초현실적 공간이에요. 너무 밝거나 어두운 느낌보다는 음양이 적절히 조화된 공존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요. 콜라주를 통해서는 신비롭고 초현실적인 공간을 보여주는 반면, 일러스트를 통해서는 동양적인 문양이나 장식적인 요소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에요.
저는 동양의 패턴을 굉장히 좋아해요. 패션을 공부할 때, 천연 염색이나 한국 패턴 같은 한국 문화를 다뤘고요. 그렇게 영감받은 것들을 일러스트로 표현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전통 문양을 보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패턴들이 많거든요. 그냥 어느 사이트의 한 카테고리에 이 좋은 문양이 묵혀진 채로 있는 게 너무 아까웠어요. 그래서 앞으로 한국 문양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해서 많은 분께 우리의 전통 문양이 얼마나 멋진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또, 외국인은 우리 전통 문양이 중국, 일본의 것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 문양만의 성격과 특징이 있거든요. 훗날에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문양을 봤을 때, ‘이건 한국 문양이다’라고 인지할 수 있도록 제 일러스트를 통해서 널리 알리고 싶어요.
그래서 제 작업물의 정체성은 ‘다양성’인 거 같아요. 어떠한 기준도 경계도 없이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을 담고 있는 것이 제 작품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한국과 영국에서 살며 마주한 다양한 감정과 여러 경험이 겹겹이 쌓여 제 작품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이 시선이 앞으로 더 다채로워지겠죠?
11. [RSK] 영감을 얻고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 속, 나만의 특정한 루틴이 있다면요?
저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영감의 재료예요. 그렇기에 기록이 가장 중요해요. 일기, 아트 저널, 리서치 북으로 기록을 해두면 언젠가 작업으로 이어지기에 항상 쓰고, 저장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콜라주의 경우에는 다양한 이미지가 필요하기에 평소 많은 이미지를 검색하고, 미리 재편집해두는 편이에요. 일러스트 문양도 많이 리서치해서 폴더에 저장하고, 손과 디지털로 다 그려봐요. 매일매일 무언가 리서치, 드로잉 하는 것이 제 루틴인 것 같아요.
12. [RSK] 내가 생각하는 나의 대표작을 하나만 골라주세요. 작품을 선정한 이유도 함께요.
미얀마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작품이 너무 기억에 남아요. 저에게는 미얀마 친구들이 있는데, 친구들이 전한 미얀마의 상황이 정말 심각했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듣고 바로 만든 작품이에요. 제 친구들은 정부에서 통신을 차단해 SNS 등으로 연락할 방법이 막혀 VPN을 쓰다가, 나중에는 연락이 두절됐거든요. 그런 상황을 보니 손목을 묶고, 눈을 가리고, 어두운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작품 속 소녀의 모습이 생각났어요.
그리고 경계가 없는 하늘에서 누구의 것인지 보이지는 않지만, 여러 개의 손이 소녀를 떠받치고 위로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혼자라고 느끼겠지만, 미얀마 사람들을 위해 많은 사람이 힘쓰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작품을 만들고, 진정한 도움의 손길을 전할 방법을 고민할 때쯤, 작품 기증을 통해 미얀마 사람들을 돕는 미얀마전 전시 공모를 알게 됐어요. 그래서 바로 지원했고, 대표작으로 선정 받았어요. 많은 분의 힘으로 미얀마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게 기뻤어요.
13. [RSK] 이 질문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할게요. 예술가로서 레지나킴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나요?
대중과 소통을 잘하는 아티스트이고 싶어요. 그리고 주제든 미디어든 한 가지에 갇혀 작업을 하기보다는 다양한 것을 다루는 여러 작업을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제가 연구 중인 ‘경계를 넘어’라는 주제처럼, 경계선 안이 아닌 경계선의 위에서 세상을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아티스트이길 바라요.
Photographs by Regina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