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세토우치 섬 지역에서 시작해 오사카와 교토, 가와구치, 도쿄를 거쳐 '섬머소닉 도쿄(SUMMER SONIC TOKYO)'까지 이어진 11박 13일의 여름휴가를 지난 8월에 다녀왔다.
아시다시피 일본의 여름은 악명이 높다. 여행을 떠날 즈음 더위에 녹아서 늘어진 음식 모형과 나고야가 40도에 육박했다는 기사가 온라인을 도배하고 있었다.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이 일본에 가본 적 있지만 8월에 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겁먹게 했다. 3월에 충동적으로 섬머소닉 티켓을 결제할 때는 일본의 여름이 가혹하다는 사실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공연 양일권 약 42만 원. 환불 불가. 성수기를 맞은 인근 호텔의 숙박비 1박에 약 30만 원. 환불 불가였으니까. 하지만 긴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재난 같은 한국의 여름에서 대피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제 한국인이 이겨내지 못할 여름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이 여행을 방학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일단 꽤 길었고, 시원한 것(맥주)을 많이 먹었고, 녹색 물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은 짙은 녹음 속에서 잠자리채를 들고 뛰고 싶은 마음이 셀 수 없이 들었으니까. 단언컨대 초등학교 2학년인 조카보다 더 신나게 여름 방학을 보낸 것 같다.

운명은 환불 불가
처음에는 섬머소닉만 보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서 이누지마(犬島)라는 섬의 사진을 보게 됐다. 압도적인 대자연, 폐허가 된 발전소 터에 지은 미술관, 수많은 설치 예술 작품들의 모습에 한눈에 반했다. 그것이 세토우치 국제 예술제(瀬戸内国際芸術祭)의 일환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가야만 했다.
일본 지도에서 오사카 아래쪽으로 약간 시선을 내리면 있는 세토우치 섬 지역에선 3년에 한 번씩 국제 예술제가 열린다. 올해가 그 3년째의 해였다. 행사의 모항이 위치한 다카마쓰와 섬머소닉이 열리는 도쿄도 지바를 한 줄로 이어보니 그 길에 오사카, 교토, 후지산 일대, 도쿄가 있었다. 이렇게 일본의 6개 도시를 잇는 긴 여정이 계획됐다. 만일 섬머소닉 티켓과 호텔을 환불할 수 있었다면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운명이란 이렇게 만들어지곤 한다.
그렇게 운명적인 여행이 시작됐다. 8월 6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다카마쓰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단단히 쥐고 뛰어야 했다. 12시 40분에 항구에서 떠나는 페리를 놓치면 3개의 섬을 2박 3일 동안 하나씩 가겠다는 계획이 틀어진다. 다행히 항구에 도착했을 땐 캐리어를 코인 로커에 집어넣고 자판기에서 물 한 병을 뽑을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페리를 타고 방문한 곳은, '박물관 섬'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오시마(直島)이다. 나오시마는 낯선 이름이지만, 쿠사마 야요이의 거대 호박 작품이 랜드마크인 섬에 대해서는 들어본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당초 세 곳의 박물관에 가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시간이 어정쩡하여 지추미술관(地中美術館) 한 곳 밖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추미술관은 아름다운 섬의 풍광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시설이 지하에 지어진 게 특징이다. 그의 건축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빛과 어둠의 웅장한 체험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다.

나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겨 준 작품은, 대지 미술가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의 <Time/Timeless/No Time>이었다. 마치 신전 같은, 상서로운 색채로 가득한 공간에 들어서면 중앙에 놓인 거대한 흑색 화강암 구체가 시야를 점령한다. 매끈하게 연마된 돌의 표면에는 천창에서 내리쬐는 시시각각의 빛과 저마다의 고된 여정을 거쳐 이 멀고 먼 땅에 도착한 관람객들의 모습이 비친다. '시간/영속/무(無) 시간'이라는 작품명에 걸맞게 시간이 분절되어 흐르는 듯한 초월적인 정적의 공간에서 모든 것이 서로의 존재를 반사하며 조화를 이룬다.

거대한 구체에 반사되는 빛, 색, 사람들을 감상하는 동안 문득 '상호작용'이란 말이 머리를 스쳤다. 살아가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를 반사시키며 만드는 상호작용이 아닐까. 혼자 여행하고, 혼자 밥을 먹는 게 익숙한 고독한 나의 삶이 사실은 단 한 번도 혼자인 적 없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이 상호작용을 발견하는 여정이었다. 8월 6일부터 18일 동안 거의 사흘 간격으로 도시를 이동하며 음악, 자연, 예술, 체력, 잘못된 결정, 생맥주, 끝없는 갈증, 우정, 열정의 상호작용이 광선처럼 교차하는 시공 안에서 자주 길을 잃었고, 행복했다.

섬머소닉, 유한함
2025년 섬머소닉 도쿄는 지바의 ZOZO 마린 스타디움 일대에서 8월 16일과 17일 양일간 열렸다. 도쿄역에서 JR게이요선을 타고 40여 분을 달리면 도착하는 가이힌마쿠하리역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 러너들의 성지인 일왕의 궁 황거(皇居) 둘레에서 아침 조깅을 하느라 10시 체크아웃에 겨우 맞춰 캐리어를 챙겼기에, 빠트린 게 있을까 봐 찝찝한 마음을 안고 역에 도착했다.
3월에 티켓을 예매해서 좋은 점은 행사장 코 앞 호텔을 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수기라 평상시보다 가격이 두 배 수준이라 결제 전에 한참 망설였지만, 돌이켜보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였다. 매일 2만 보 이상 걷는 여행을 열흘 동안 했더니 몸과 마음의 체력이 바닥나 있었다.
호텔에 캐리어를 맡기고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머슴밥 먹기였다. 이른 아침에 대충 끼니를 때웠지만, 살인적인 더위와 치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버티기 위해선 과하게 먹고 수분을 보충해서 생존 본능을 달래야 한다. 편의점에서 칼로리가 제일 높아 보이는 카츠산도와 주먹밥, 이온 음료 큰 페트병을 사서 우걱우걱 먹으면서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섬머소닉은 처음이다. 하지만 낯설지 않았다. 2019년 도쿄 리퀴드룸에서 열린 '出れんの!?サマソニ!?(나갈 수 있는 거야!? 섬머소닉에?!)' 최종 심사 라이브에 간 적 있다. 각 부문에서 우승한 팀이 섬머소닉 출전권을 얻는 경연이다. 매년 수천 팀의 인디 뮤지션이 '出れんの!?サマソニ!?'에 도전한다. 대중에게 공개되는 최종 심사 라이브에 오르는 건 열다섯 팀 남짓. 여기에서 또 한 번 승리해야 최종으로 무대에 서게 된다. 이 엄혹한 여정을 거쳐 올해 도쿄와 오사카 섬머소닉에는 총 8팀이 무대에 섰다.
이틀 동안 이 거대한 뮤직 페스티벌의 어느 공간에서도, 어떤 스테이지에서도 '出れんの!?サマソニ!?'에서의 공기가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심사에 영향을 미칠까 봐 박수조차 쉽게 치지 않던 관객들, 냉정한 공연장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필사적이던 가수들. 선크림을 수없이 덧칠하고, 하마처럼 물을 마시고, 물집으로 엉망이 된 발로 힘겹게 스테이지를 오가는 2025년의 현실과 2019년 어느 날이 쉴 새 없이 상호작용하는 속에서, 유튜브로 음악을 보고 듣는 시대에 잊힌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음악은 쉽지 않다. 그래서 리스너가 안락하지 않을 때, 더 뜨겁게 삶과 겹쳐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KATSEYE의 공연이 가장 인상 깊었다. 관객 반응이 크지 않다고 알려진 일본인데도 피날레 송인 <Gnarly>를 부를 때 떼창이 터져 나왔다. 데뷔 만 1년이 갓 넘은 신인이고, 별다른 일본 활동도 한 적 없는, 미국 국적이 다수인 K팝 스타일 걸 그룹에 쏟아지는 환호였기에 더 놀라웠다. 아는 노래라 신났는지,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현실의 울분 때문인지, 언제나 소극적인 관객이었던 나도 "Gang gang gang gang gang"을 목 놓아 외쳤다. 멤버 마농이 건강 문제로 당일 공연 불참을 알렸지만 조금의 빈틈도 없이 공연을 소화했다. 더할 나위 없이 잘했고, 그것을 넘어서는 여유와 격정도 보여줬다.
2023년 하이브와 게펜 레코드가 합작해 미국 시장을 겨냥한 글로벌 걸 그룹을 만든다고 했을 때 이들의 미래를 낙관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거다. 성공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근면(가혹한 트레이닝), 자조(살벌한 경쟁), 협동(공동체주의)의 새마을 정신 시스템에서 만들어지는 K팝을 과연 다양한 문화권에서 성장한 멤버들이 소화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런데 KATSEYE가 그걸 해냈다. 데뷔한 해인 2024년엔 틴팝 스타일의 <Debut>, <Touch>를 선보였다. 듣기 좋은 노래였지만 KATSEYE가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던 것 같다. 올해는 기세가 대단하다. <Gnarly>는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멤버들의 폭발적인 정체성을 녹여내는 용광로로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하다. 그들의 공연에서 어떤 미래를 목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삶과 가장 깊이 상호작용을 한 공연은 HYDE였다. 설명하기 위해선 시간 여행을 좀 해야 한다. 나의 학창 시절. 그러니까, 초고속 인터넷 보급과 일본 문화 전면 개방이 맞물리며 J팝과 드라마가 물밀듯이 일상으로 쏟아지던 고등학생 시절의 얘기다. 써클방을 청소하다가 졸업한 선배가 두고 간 흰색 공테이프 하나를 발견했다. 선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만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녹음한 2002년 버전 프라이빗 플레이리스트였다. 테이프엔 "L'Arc~en~Ciel"이라고 검은색 사인펜으로 적혀 있었다. 그것을 "라르크 앙 씨엘"로 읽는다는 걸 알게 되기도 전에, 밴드 보컬의 이름이 HYDE라는 걸 알게 되기도 전에 사랑에 빠졌다. 테이프의 첫 번째 곡은 <Loreley>(1998)였는데, 서늘한 피아노 건반 음으로 시작하여 장렬하게 휘청이는 이 노래에 빨려 들었던 날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길을 헤매서 조금 늦게 HYDE가 공연하는 마운틴 스테이지(Mountain Stage)에 도착했다. 하드코어한 그로울링 소리가 장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 학창 시절의 영웅은 여전히 강력하고, 눈부셨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 사람들이 불쑥 내 허리에 팔을 감고 헤드뱅잉을 시작했다. 카메라를 내리라는 계시처럼 들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클핏(Circle Pit)에 휘말려 들었다. 한참 돌다 보니 무대와 몹시 가까운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피날레 곡은 동명의 만화가 원작인 영화 <나나>의 OST <Glamorous Sky>였다. 그리웠던 미성의 보컬을 듣는 동안, 만화에서 내가 좋아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달의) 영휴(盈虧)의 루프는 숙명적." 달의 숙명처럼, 우리의 삶도 끝없이 이지러지고 다시 차오르며 연결된다. L'Arc~en~Ciel의 테이프를 발견했던 십 대 시절의 나와 30대 후반이 된 2025년의 내가 연결되어 같은 감동을 느끼는 것처럼.
섬머소닉에선 K팝이거나, K팝스러운 팀의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 시간표가 꽉 찼다. 일본 문화를 동경하며 자라난 세대인 나는, 한국인의 음악이 일본에서 주류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영지의 공연 오프닝 곡이 <나는 이영지>였다는 사실을, 그래서 모든 관객이 "나는 이영지"를 따라 외쳤다는 것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평소엔 엽떡을 좋아하고, 밈에 능한 인터넷 친구처럼 내적 친밀함을 느끼지만 무대에서 이영지는 언제나 그랬듯 초면이 된다. 강력하고 아름답게 무대를 장악하며,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의 시대의 반증을 보여줬다. 이영지는 멋지다.

K팝 스타일을 이식한 신인 걸그룹 HANA의 공연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공연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데뷔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스테이지 근처로 진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렸기 때문이다. 공연장 밖을 겹겹이 둘러싼 인파 속에서 그들의 라이브를 눈을 감고 감상했다. HANA에겐 훨씬 더 큰 무대가 주어져야 한다. 섬머소닉에서도, 앞으로도.
가장 즐거웠던 공연은 Fall out boy였다. 아마도 가장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는 눈 닿는 모든 곳에서 맥주를 판다. 어른어른한 기분으로 가장 좋아하는 4층 가운데 구역의 맨 끝줄에 앉아서, 사실은 누워서 공연을 봤다. 그 구역엔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누워있거나, 떼창의 민족인 내 눈에도 과하게 신난 사람들만 있었다. 숙박을 근처에 잡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기 때문인지 헤드라이너의 공연임에도 4층은 꽤 비어 있었다. 피날레가 가까울 즈음 Fall out boy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The Last Of The Real Ones>가 연주됐다.

"I was just an only child of the universe(난 이 우주 속에 홀로 남겨진 아이였지)", "You're just the last of the real ones(넌 마지막으로 남은 진짜 존재니까)", "I'm here, at the beginning of the end(난 지금 끝의 시작점에 있어)" 가사를 채 다 곱씹기도 전에 찬란한 공연이 막을 내렸고, 영원할 것처럼 폭죽이 터졌다. 돌이켜보니 가장 즐거웠던 공연이 아니라, 가장 서글펐던 공연인 것 같다. 모든 것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일생 동안 그토록 사무친 적 없었다. 나의 여름 방학은 그렇게 끝났다.
안녕, 나의 여름 방학
11박 13일의 꿈 같은 여행을 마치고 새벽에 귀국해 곧바로 출근했다. 아침엔 한국 직장인의 조식인 메가커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점심엔 꿈에 그리던 엽떡을 먹었고, 저녁엔 여행 기념으로 인생 처음으로 해본 젤 네일을 제거했다.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너무 많은 상황이라 익숙하지 않은 손톱의 길이와 무게가 거슬렸다. 그렇게 반나절도 되지 않아 현실로 완전히 복귀했다. 남은 것은 3천여 장의 사진과 영상, 온갖 데에서 산 기념 굿즈, 그리고 무서워서 여행하는 동안 차마 확인하지 못했던 카드값 명세서.
벌써 군고구마 냄새가 몸을 마비시킬 정도로 달콤하게 느껴지는 계절이 됐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여름 속을 살아간다. 세토우치의 충만한 해풍, 지추미술관의 웅장한 빛과 어둠, 땡볕 아래를 하루 종일 죽을 듯이 걷고 늦은 밤에 먹은 가라아게와 생맥주의 맛, 섬머소닉의 불꽃놀이와 상호작용하며 언제까지라도 그 여름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