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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관, 트로트의 삶을 살다

 

트로트의 큰 별이 졌다. ‘해 뜰 날’, ‘차표 한 장’, ‘네박자’ 등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가수 송대관이 지난 2월 7일 향년 79세로 영면에 들었다. 오랜 무명 시기를 딛고 인기 반열에 올랐던 그는 특유의 푸근하고 인간적인 매력으로 대중을 끌어안았고,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트로트에 새바람을 일으키며 장르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는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도 무대와 방송, 콘서트와 지역 행사를 누비며 서민의 고락과 함께했다. 송대관의 삶이 곧 애환의 음악, 트로트였다.

 

1946년 6월 2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난 송대관은 고등학교 졸업 후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에 왔다. 단돈 200원을 들고 상경했다는 그는 새벽이슬 맞으며 잠드는 노숙 생활도 마다하지 않고 꿈을 키웠다. 당찬 포부와 달리 1967년 발표한 데뷔곡 ‘인정 많은 아저씨’는 배호, 남진, 나훈아, 이미자, 정훈희 등 당대를 대표하는 가수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꿈을 찾아 서울에 온 가수 지망생에서 무명 가수가 된 그는 종로구 창신동의 단칸방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해 뜰 날’을 기다렸다. 블루스풍의 ‘세월이 약이겠지요’(1971)가 나름의 반응을 얻었지만, 히트라고 하기엔 아쉬운 정도였다.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송대관이 직접 작사한 ‘해 뜰 날’(1975)은 그의 염원이 담긴 곡이었다. 8년 차 무명 가수였던 그는 비록 지금은 안 되는 일투성이지만, 쨍하고 해 뜰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가사를 썼다. 그렇게 쓴 노랫말을 들고 ‘세월이 약이겠지요’를 만든 작곡가 신대성을 한밤중에 찾아가 “나도 한번 떠야겠다”며 곡을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절박한 심정은 신대성의 밝고 경쾌한 멜로디와 만나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경제 성장기에 찬물을 끼얹은 석유 파동으로 얼어붙은 시장 상황에 ‘해 뜰 날’의 긍정적 메시지는 국민에게 한 줄기 햇살 같은 희망을 줬다. 대공황 시대의 미국인에게 주디 갈란드의 ‘Over The Rainbow’(1939)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송대관의 ‘해 뜰 날’이 있었다. 시대 정신이 된 ‘해 뜰 날’로 그는 연말 가요 대상을 휩쓸고 가수왕에 오르며 성공의 기쁨을 누렸다.

 

 

영광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의 주 수입원이었던 극장 쇼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그룹사운드와 밴드 음악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트로트의 입지가 줄어든 것이다. 음악적 판도가 바뀌면서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1980년 미국 이민을 택했다. 미국에서 대형 슈퍼마켓 등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마음속에는 늘 고향과 음악이 있었다. 향수병에 시름시름 앓던 그는 1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1988년 귀국 당시 음악계의 풍경은 이전과 또 달랐다. 김완선, 박남정, 소방차 등 하이틴 스타들이 화려한 댄스로 인기를 끄는가 하면, 이문세와 변진섭은 서정적인 발라드로 신드롬을 일으켰고, 트로트 진영에서는 주현미, 이태호 같은 젊은 가수가 주목받고 있었다.

 

 

가요계 복귀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셋. 중년의 나이, 쉽지 않은 상황에 발표한 ‘혼자랍니다’(1988)가 좋은 호응을 얻었고, 이듬해 ‘정 때문에’(1989)가 20만 장 넘게 팔리는 흥행을 기록하며 컴백의 발판을 마련했다. 결정타는 ‘차표 한 장’(1992)이었다. 상행선과 하행선에 각각 몸을 싣고 이별하는 연인의 모습을 그린 미디엄 템포 트로트 곡으로 그는 다시 한번 우뚝 섰다. 한참 어린 후배 가수 태진아와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쌍끌이 인기를 도모하는가 하면,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린 시기도 이때부터다. 이후 ‘큰 소리 뻥뻥’(1993), ‘고향이 남쪽이랬지’(1995), ‘네박자’(1998), ‘유행가’(2003), ‘사랑해서 미안해’(2004) 등을 차례로 히트시키며 트로트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무렵 네 가수의 동반 인기, 시너지 활약으로 장르의 문법이 바뀌기도 했다. 한이 서린 비애감의 전통 가요에서 희비가 공존하는 흥겨운 성인 가요로 변화한 트로트는 1990년대 아이돌 댄스와 알앤비의 인기 돌풍 사이에서도 살아남았다.

 

 

송대관 음악의 힘은 느긋한 낙관주의였다. 지난했던 무명 시기에도, 긴 공백기를 보내고 돌아올 때도, 말년에 개인사로 어려움을 겪을 때도 그는 무너지지 않고 노래했다. “쨍하고 해 뜰 날”을 기다리며 노래했고, “오늘 하루 힘들어도 내일이 있으니 행복”하다며 사람 좋은 미소로 ‘유행가’를 불렀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내려 보는 사람과 위를 보는 사람 모두 어차피 쿵짝이라던 ‘네박자’는 가요 역사에 길이 남을 평등의 송가다. 그는 삶의 기복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꿋꿋이 위로와 격려를 전하며 트로트 그 자체를 살았다. 울고 웃는 인생사, 연극 같은 세상사를 노래한 가수 송대관의 안식을 빈다.

 

대중음악 평론가 정민재

 

 

<사진 제공 - 스타라인업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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