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영화라는 매체가 그렇다. 한 프레임을 넘어, 한 장면을 넘어, 한 신을 넘어, 스크린 밖으로 관객에게 끊임없이 묻곤 한다. 잊고 있던 삶의 단면들과 당연시하던 신념들을. 나의 마음을 울리는 말들과 너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로.
모처럼 산뜻했던 봄날, 집요하게 따라가고 탐구하는, 지독하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천천히 살피고 들여다보는 작품들을 만나고 왔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오가고, 다양한 국경과 주제들을 넘나들며 갖게 된 단상들을 공유한다.

<팔림프세스트: 이름에 관한 이야기> / 메리 스티븐 감독
에릭 로메르 감독의 편집자로 일했던 메리 스티븐. 그는 서양의 성을 가진 중국인으로서, 그 유래를 쫓아 가족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수많은 녹음과 일기, 사진과 영상들이 품고 있는 기억은 무엇인가. 호주, 홍콩, 캐나다를 거치며, 식민주의와 자본주의를 고스란히 통과한 어느 디아스포라의 오염된 역사. 감독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만의 신화를 덧대었다. 그의 다시-쓰기, 즉 사대주의는 경계하되 철저한 자기 객관화를 거친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이제 관객에게 주어진다. 또 다른 해석과 고찰의 여지를 기다리면서.

<6주 후> / 샤클린 얀센 감독
엄마의 마지막 숨소리로 시작한 7분가량의 롱테이크. 이는 앞으로 로레가 지닐 상실의 무게를 가늠케 한다. 딸의 슬픔을 가중하는 건, 장례를 준비하며 맞닥뜨리는 주변인들의 이기적이고 냉정한 요구들. 감독은 6년 전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극심한 팬데믹 상황 속의 죽음을 극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애도에 관한 가장 현실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가톨릭의 전통에 따르되 결코 관습적이지 않은 6주 후의 추모식이 열리고 비로소 주인공이 짧은 안식에 들기까지, 그 쉽지 않은 과정의 순간을 담담히 서술하면서.

<마우스> / 켈리 오설리반·알렉스 톰프슨 감독
자신과 달리 늘 반짝이는 단짝 캘리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미니. 때로는 질투했지만 그 누구보다 아끼던 친구가 허망하게 죽자, 그는 방황하기 시작한다. 미니의 결핍과 상실감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한 깨달음으로, 캘리 어머니의 마음속 빈자리를 채우려는 노력으로, 꼬여있던 가족 관계를 회복하는 기회로, 건강한 애도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처음 들었지만 괜히 자처했던 캘리의 '미니 마우스' 되기. 그 그늘에서 벗어나 온전한 '미니'가 될 때까지의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여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 / 김종관 감독
벚꽃이 휘날리는 따스한 봄, 한여름 밤의 끈적한 공기, 차갑고도 포근한 겨울의 기운. 서촌을 배경으로 각 계절의 단면과 꼭 닮은 옴니버스가 펼쳐진다. '산책하는 남자' 속 한경은 짐짓 가벼운 발걸음으로 끝없이 만남을 소망한다. '숨 고르기' 속 보라는 관심 있는 상대의 마음을 서두르지 않고 은근히 사로잡는다. '마리' 속 마리는 자신의 삶과 구분할 수 없는 역할을 소화하며 긴 잠에서 깨듯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현대인의 외로움, 갈증과 욕망, 방치된 슬픔 등을 소소한 웃음과 뒤이은 여운으로 이끄는 작품.

<바바라 포에버> / 브라이디 오코너 감독
한껏 자유로워진 신체와 사상을 실험적으로 배치한 영상 감독. 레즈비언에 의한, 레즈비언을 위한, 퀴어 시네마를 만든 주인공. 바로, 바바라 해머다. 그의 작품들은 1970년대 2차 페미니즘 운동과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한 퀴어 운동, 90년대 뉴 퀴어 시네마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시간을 관통한다. 남성에게 기울어진 아방가르드 영화판을 뒤흔들고, 활동가로서 수없이 행동하며, 진솔히 사랑하던 바바라의 대담한 생애. 고리타분한 관습과 편협한 믿음을 벗어던진 여성들을 50년 넘게 포착해 온 그의 기개가 벌써 그리워진다.

<춘슈> / 장률 감독
어떤 장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혹은 부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뤄온 장률 감독이 이번에는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를 담았다. 또다시 배우의 꿈을 놓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춘슈는 그동안 소원했던 어머니, 연기 스승인 장메이, 그를 모시는 아들 둥둥을 만나 느슨한 산책을 이어간다. 단정한 거리 위에서 내내 비슷한 옷차림으로 맴도는 푸르스름한 풍경들. 황폐해진 영화 스튜디오, 인적이 드문 서점, 각 거처와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사뭇 현실적이지만, 잃어버린 언어와 사라진 문화의 흔적을 자꾸만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낭만적이기도 하다. 곳곳에 숨겨진 은유와 재치 있는 연출로 완성한 영화다운 영화.
<사진 제공 - 전주국제영화제>


